★해병대 사령관 글/초대사령관 신현준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7) 후방에 남은 가족

머린코341(mc341) 2014. 7. 4. 14:30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7) 후방에 남은 가족

 

  6·25 동란의 발발로 제주도에 주둔중이던 해병대 전 병력이 진해로 이동한 뒤, 제주도에는 극소수의 병사들만이 남아서 군인가족들을 보살폈다.   마침 만삭(滿朔)의 몸이었던 아내 혜룡은 장남 옹목이를 서울에 있는 외가에 맡겨두고, 네 살된 딸 순희(純姬)와 두 살된 옹인(雍仁)이를 보살피면서 힘들게 지내고 있었다.

 

  그 뒤 아내는 어렵게 구한 진해로 가는 선편으로 뒤따라 왔는데, 그때에는 이미 부대가 부산으로 이동한 뒤였다. 이에 아내는 전선으로 떠나는 남편에게 작별 인사라도 하고자 무거운 몸으로 두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다시 부산으로 찾아갔다.

 

  부산 부두에 도착한 아내 혜룡은 우리 해병들이 새로운 복장을 갖추고 단정하면서도 씩씩한 모습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큰 기쁨을 느꼈다. 아내는 지나가는 병사들을 붙잡고 사령관인 나의 행방을 알아보기 위해 무척 애를 썼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몹시 실망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우연히 사령관의 차의 운전병이었던 김상현(金相賢) 해병을 만나게 되었다. 김 해병이 아내를 보고 깜짝 놀라서, "사모님이 이곳에 와 계시다니 어제 된 일입니까?"하고 묻자, 아내 혜룡은 그만 그 자리에서 흐느껴 울고 말았다.

 

  결국 아내는 두 아이를 데리고 김 해병의 안내를 받아 부산 시내로 가서 조그만 방 하나를 얻어 들게 되었다. 아내와 이이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서도, 때마침 인천 상륙작전 출동 준비로 한창 바빴던 나는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멀리 제주도에서 애써 찾아온 처자식을 바로 찾아가 보지도 못한 나는 몹시 미안함을 느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시간을 내어서 당시 부관(副官)이었던 이동호(李東湖)소위의 권고와 안내를 받아 아내 혜룡과 아이들이 머물고 있던 숙소를 찾아간 것이, 인천 상륙작전을 위해 부산을 출항하기 직전인 1950년 9월 13일 새벽 3시경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해산할 것 같은 만삭의 아내 모습을 보았을 때에도 중대한 작전을 앞두고 매우 긴장되어 있었던 나는, 아내가 가엽기는 했으나 무어라 위안을 주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이르기를, "나는 지금 당신과 길게 이야기할 시간조차 없는 형편이오. 이번 작전에 나가서 승리해야만 우리가 서로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이번 작전은 우리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큰 작전이니, 당신은 그렇게 알고 우리가 꼭 승리할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해주기 바라오. 그리고 저 어린아이들을 잘 키워주기만을 바라며, 이토록 융통성이 없는 내가 당신에게 할 말은 언제나 똑같은 말인 미안하다는 말 뿐이라오." 라고만 하였다.

 

  이 말을 끝으로 우리는 서로 작별하였는데, 아내 혜룡은 아무말도 못하고 울고만 있었다.

 

  그 뒤 만삭의 몸이었던 아내는 10월 6일 진해에서 둘째 딸 순옥(純玉)을 낳았다. 서울이 수복된 뒤 아내 혜룡은 거처를 서울로 옮겨 갔었는데, 그때 함께 데리고 갔던 장녀 순희는, 내가 해병대를 이끌고 북진하여 함홍 지구 전선까지 진출하였을 때인 11월 22일, 그만 뜻밖의 총기 사고로 죽고 말았다.

 

 

처 : 예비역 해병중장 신현준 초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老海兵의 回顧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