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초대사령관 신현준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6) 영월 지구 작전

머린코341(mc341) 2014. 7. 4. 14:28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6) 영월 지구 작전

 

  일단 포항으로 철수했던 우리 해병대는 그뒤 한동안 미 해병 제1사단에 배속되어 작전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무렵 태백산맥(太白山脈)을 타고 다시 남하중인 적은 맹렬한 공세로 영월(寧越) 지구 일대를 수비중이던 우리 육군부대를 극도의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러한 급보(急報)에 접한 우리 해병대는, 적을 섬별하고 아군을 구출하기 위해 주도(周到)한 계획 아래 야간 행군을 감행하였다. 이어서 현지에 도착한 해병대는 1951년 2월 21일 새벽 5시를 기해서 적 주력 부대의 숙영지를 기습 공격하였다.

 

  이 날 새벽, 대부분의 적들은 취침중이었고 일부는 아침 식사준비를 서두르다가 불의의 기습을 당하게 되자, 크게 당황하여 아군에게 제대로 대항도 못 해본 채 도주하고 말았다. 당시 이렇게 큰 전공(戰功)을 세운 부대는 대대장 염봉생(廉鳳生) 중령이 직접 공격의 선두에 섰던 제2대대였다.

 

  기습작전이 성공한 이날 아침 9시경, 나는 해병 부대를 인솔하고 육군의 유재흥(劉載興) 장군이 지휘하고 있던 제3군단 야전사령부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때 나는 유재흥 장군을 만나 잠시동안 걸음을 멈추고 대화하게 되었다. 유 장군은 내게 말하기를 "신 장군이 해병대를 참으로. 용감하게 씩씩하게 잘 키우셨소."하고 칭찬하면서, 오늘 아침의 작전 성공에 대해 각별히 치하하고 감사하였다.

 

  그 뒤 나는 유 장군 휘하의 사단장이었던 김형일(金炯-) 장군과 만나서 적정(敵情)을 청취하였다. 당시 전해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육군 제3군단에 파견되어 있던 미군 고문관은 갑작스런 적의 공격으로 사태가 위급해지자, 잠시 현지를 피해서 떠나 있기까지 했었다고 한다.

 

  영월지구 작전 이후 다시 전세가 호전되자, 우리 해병대는 다시 북진하여 아군과 적군이 서로 대치중인 전선으로 진출하였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을 맞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 해병대는 상부의 명령과 지시에 따라서 김일성 고지전투, 도솔산 지구 전투를 치렀다. 그러다가 휴전 협정에 의하여 전쟁도 평화도 아닌 상태를 맞게 된 우리 해병대는, 이제 새로운 각오와 자세로 부대를 재정비하게 되었다.

 

 

처 : 예비역 해병중장 신현준 초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老海兵의 回顧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