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초대사령관 신현준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8) 장녀 순희의 죽음

머린코341(mc341) 2014. 7. 4. 14:31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8) 장녀 순희의 죽음

 

  내가 북진을 계속하여 함흥 지구 전선까지 진출하였을 때, 아내 혜룡은 아이들을 데리고 수복된 서울의 장충동(獎忠洞)에 임시거처를 정하여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인 11월 22일 아침의 일이었다. 아내 혜룡이 그날의 찬거리 장만을 위해 시장으로 나가려고 했을 때, 장녀 순희가 그날 아침따라 유난스럽게 같이 가고 싶다면서 애원하고 보채었다한다. 그러자 아내는 순희에게 "엄마가 장에 가서 네게 꼭 맞는 신발 한 켤레를 사 가지고 올 테니, 돌아을 때까지 집을 잘 보면서 기다리고 있거라."하고 타이른 뒤 혼자서 집을 나섰다. 아내 혜룡이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또 순희에게 줄 신발 한 켤레까지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순희는 그만 이미 숨져 있었다.

 

  당시 우리 집에는 사령관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경비병이 파견 나와 있었다. 그런데 아직 어린 장남 옹목이가 경비병의 칼빈 소총에 실탄이 장전되어 있었던 것을 모르고 장난을 치다가, 그만 오발 사고를 일으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순희는 머리에 한발의 총탄을 맞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고, 같은 총탄에 맞았던 당시 16세이던 처제 혜금(惠今)은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역시 목숨을 구할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아내 혜룡은 너무도 큰 충격과 슬픔에 기가 막혔다. 아내의 마음을 더욱 아프고 괴롭게 하였던 점은, 순희가 그냘 아침따라 엄마를 따라서 가겠다고 유난스레 보채는 것을 뿌리치고 혼자 시장에 갔다는 데서 오는 자책감이었다. 아내로서는 혹시 그때 순희가 원하는 대로 시장에 데리고 갔더라면, 이런 엄청난 변을 모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무렵 처제와 가까이 지내면서 우리 집에 드나들고 있었던 한 처녀가 있었는데, 그 처녀는 '수산나'라는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였다.

 

  순희가 숨을 거두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보았던 수산나는 아내 혜룡에게, 순희에게 세례(洗禮)를 주어서 천주교 묘지에 묻는 것이 딸을 위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권유하였다. 이때 아내 혜룡은 다른 생각을 해 볼 만한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으므로 그녀의 권유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순희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사후 영세를 주도록 한 뒤 천주교 묘지에 묻었다.

 

  순희의 갑작스런 즉음이 우리 가족에게 준 충격은 너무도 켰다. 더욱이 나는 유달리 장녀 순희를 사랑했던 터였다.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수도 서울이 탈환 수복됨에 따라 그동안 헤어져 있던 장남 옹목이와 만나게 된 기쁨에 이어서 이번에는 순희의 죽음을 보게 되니, 그 아픔과 슬픔은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나는 이러한 사고가 있기 직전인 11월 18일, 함흥 지구 전선에서 급한 용무가 있어서 비행기 편으로 서울을 다녀온 터였다. 뒷날 김동하 소령으로부터 이 불행한 소식을 전해 들었던 나는, 너무도 놀랍고 어이없는 일이라서 한동안 도저히 이 사실을 믿을수가 없었다.

 

  당시 아홉 살이었던 장남 옹목이는 서울 외가에 있다가 6·25동란을 맞았다. 그리하여 적치하(敵治下)에서 지내는 동안 어린 옹목이는 인민군(人民軍)들이 부르던 노래나 행동을 그대로 흉내내면서 놀곤 하였다.

 

  사고가 있던 그날도 옹목이는, 경비병이 잠깐 변소에 간 들을 타서 소총을 갖고 놀다가 그만 오발 사고를 내었던 것이다. 경비병은 평소 총기 취급에 특별히 주의해 왔으나, 그날따라 소총의 안전장치를 소홀히 하였기에 사고가 나고 말았다.

 

  이런 엄청난 사고가 난 뒤, 어린 옹목이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때문인지 한동안 집을 나가서 자취를 감추기까지 하였다. 한편, 순희에 이어서 병원에서 숨지고 만 처제 혜금도 역시 '루시아'라는 이름으로 대세(代洗)를 받아서 천주교 묘지에 안장(安葬)하였다.

 

  이보다 앞서 나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처제 혜옥(惠玉)의 남편인 박길룡(朴吉龍) 소령은 6·25 동란 발발 직후, 우군(友軍)의 오폭(誤爆)으로 인하여 전사하였다. 결국, 나의 처가이자 아내 혜룡의 친정에는 불행이 거듭되었던 셈이었다.

 

  나는 커다란 충격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때일수록 자신이 처한 위치와 국가가 맡긴 책임에 대하여 더욱 깊이 생각하고 전념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6·25 동란이라는 국가적인 비극을 당하여, 사랑하는 가족들을 희생하거나 조국을 위해서 바쳤던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불행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순희가 숨진 뒤에 나는 스스로도 많이 달라졌음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원래 어려서부터 많은 고생과 시련을 겪으면서 살아온 탓인지, 웬만한 일에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으며 매사를 냉정하게 대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장녀 순희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마음도 많이 약해졌는지,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잦아진 것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특기(特記)할 사실은 순희의 죽음과 영세가, 뒷날 우리 부부는 물론 결정적인 가족 모두가 천주교에 귀의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인데, 이에 관해서는 뒤에 다시쓰기로 한다.

 

 

처 : 예비역 해병중장 신현준 초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老海兵의 回顧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