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9) 천막 사령부
본래 독립된 단위의 부대는 전방의 제일선에 나가서 작전을 수행하는 전투 부대와, 이러한 부대를 지원하기 위한 후방 사령부를 설치해서 운영해야 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우리 해병대는 6·25 동란 직후에도 이렇게 전·후방을 분리해서 부대를 운영할 형편이 못 되었다. 즉, 한동안은 해병대 사령관인 내가 제일선의 연대장직도 겸임하여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여러 면에서 문제가 생겨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부대를 운영할 수는 없게 되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비교적 장기간 보관해야만 하는 중요한 서류를 전투 부대가 보존 관리하다가 작전중에 분실해 버리는 등의 문제들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결국 1950년 12월 21일을 기해서 부산시 용두산(龍頭山)에 해병대 사령부를 다시 설치함으로써 전·후방 부대의 분리 운영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일단 자신의 위치를 사령부 내에 정하고, 필요에 따라서 수시로 전방의 제일선 부대를 시찰하게 되었다. 당시 부산시 용두산에 설치된 사령부는 임시로 천막(天幕)을 치고 지냈는데, 사령관과 미군 고문관용 천막은 별도로 설치하였고, 그 밖의 각 부서들은 가운데의 통로를 사이에 두고 8동씩, 총16동(棟)의 천막을 설치하여 사용하였다.
그리고 약간 언덕이 진 한쪽에는 천막이 아닌 나무판자로 가건물을 지어 교회로 사용하였다. 매주 일요일에는 이곳에서 우리 해병대의 종군신부였던 유봉구(柳鳳九) 신부가 여기에서 천주교 미사를, 그리고 종군 목사인 박(朴) 목사는 개신교 예배를 드렸다.
출처 : 예비역 해병중장 신현준 초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老海兵의 回顧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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