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10) 천주교 신자가 되다
앞에서도 쓴 바 있듯이, 우리 부부가 천주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43년 7월, 당시 만주의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하고 있던 내가 아내와 함께 명월구(明月構)에 있는 성당을 처음으로 찾아갔을 때부터였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950년 11월, 장녀 순희가 불의의 사고로 숨질 때,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사후 영세를 하고 천주교 묘지에 묻히게 된 일을 계기로, 우리 가족은 모두 천주교 신자가 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그 뒤 우리 가족은 2년에 걸쳐서 천주교 신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갖춘 뒤, 마침내 1952년 11월 9일 모두 함께 영세하였다. 우리 가정에 평화와 즐거움을 안겨다 준 신앙생활이 비로소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부산 메리놀 병원의 부속성당에서 영세 입교할 때 캐롤 안 몬시뇰(Msgr. Carroll 安)께서 주례를 맡아 주셨다. 특히 나는 유봉구 신부의 추천으로 장면(張勉) 박사를 대부(代父)로 모실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나는 요아킴, 아내 혜룡은 안나, 장남 옹목은 베드로, 3남 옹인은 요안, 2녀 순옥은 세실리아라는 세례명으로 부르게 되었다.
천주교에 입교하기 전에 나는 정달빈(鄭達斌) 목사를 비롯한 종군 목사들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서 개신교에 입교할 것을 권고 받았었다.
당시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개신교 신자였고, 해군 참모총장 손원일 제독 역시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까닭에, 때로는 공식적인 모임에서도 개신교식 기도회를 갖기도 했었고, 나 역시 여러번 이런 기도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해병대 사령부가 부산 용두산에 설치되어 있을 때, 아내 혜룡은 일요일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천주교 미사에 참례하였으나, 나만은 때때로 개신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보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서 우리 부부 사이에 불화와 갈등이 생긴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당시 내 주변의 많은 개신교 신자들은 나에게, "하필이면 고지식하게도 천주교를 믿으려고 하느냐."고 나의 영세를 만류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손원일 제독은 내게 농담조로, "귀관이 천주교 신자가 된다면, 장차 장관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네." 하고 웃으며 말해 주기도 하였다.
이들의 말은 모두 나의 장래를 생각하고 해 주는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천주교를 택하였던 것인데,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순희의 죽음과 사후 영세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예비역 해병중장 신현준 초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老海兵의 回顧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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