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12) 이 대통령과의 특별 면담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조인됨에 따라 6·25 동란은 일단 막을 내리였다. 그리고 나는 이해 10월 1일부로 당시 부사령관이었던 김석법(金錫範) 장군에게 해병대 사령관직을 인계하였다. 나와 김석범 장군은 만주 봉천군관학교 5기 동창생으로서, 서울 탈환 뒤에 손원일 제독은 김 대령의 출신으로 보아서 해병대로 전과(轉科)하는 것이 본인의 장래에 유리할 것이라고 권유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김 대령은 1951년 7월에 해병대로 전입하였는데, 이제 다시 나의 후임자로 임무를 교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해병대를 창설했을 때부터 쌓은 공로로 보아서는, 당시 해병전투단(확대된 연대 규모) 단장으로서 전방 제일선에 나가서 일해왔던 김성은 대령이 후임자로 되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김성은 대령은 아직 나이가 젊었기 때문에, 김석범 장군이 나의 후임자가 된 것이었다.
사령관직을 인계하기 전인 9월 15일, 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호출로 경무대(景武臺)에 가서 단독 면담을 가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 자네가 사령관직을 내놓겠다고 했다는데, 이런 시기에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자네가 뜻하는 바를 한 번 듣고 싶네."라고 하였다.
이에 나는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제가 해병대 사령관에 임명되어 해병대를 창설한 지 이미 4년 7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으로는, 오늘날 해병대는 전방 제일선에 나가 있는 전투 부대를 강화해 나가야 할 줄로 믿고 있습니다. 지금 제 나이가 38세인 까닭에 아직 퇴역(退役)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기회에 해병 전투단을 여단(旅團)으로 조직을 확대 편성하는 일을 맡겨 주실 것을 해군 참모총장께 진언(進言)한 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대통령께 말씀드리자, 이 대통령은 나의 뜻을 받아들여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초대 해병대 사령관직에서 물러남과 아울러 해병 여단 편성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1953년 10월 15일에는 마침내 우리 해병대의 유일한 전투 부대인 해병 제1여단이 경기도 금촌(金材)에서 정식으로 창설되었다.
이 날 해병 제1여단 창설 기념식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친히 임석하여 나에게 은성태극무공훈장(銀星太極武功勳章)을 수여하면서 그간의 공로를 치하해 주었다. 그리고 기념식이 끝난 직후에는 나에게 "海兵 殊勳 贈 第一旅團長 申鉉俊 少將 雩南"이라고 쓴 친필 휘호(揮毫)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출처 : 예비역 해병중장 신현준 초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老海兵의 回顧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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