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5. 6·25戰爭과 海兵隊
(13) 姑寺里 戰鬪
8월 1일 오후 1시경에 이르러 구두로 수령했던 서부지구 전투사령부의 작전명령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즉 진주를 점령한 것의 주력은 진동리를 거쳐 마산을 점령할 목적으로 동진(東進) 중에 있으니 해병대는 진동리 서방에서 적을 저지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진동리에는 미 육군부대가 이미 배치되어 있고, 또 육군의 민기식 부대(이 때부터는 7사단이란 부대명을 쓰지 않게 되었음)는 군북(群北) 방면에서 동진하는 적을 저지할 것이라는 우군사항에 대한 간략한 설명도 있었다.
그리하여 그날 밤 9시 30분경 나는 부대를 이끌고 진동리로 출동했다. 그러나 그 때 차량이 부족해서 부득이 1중대를 성호국민학교에 잔류시켜두었다가 배속부대에서 차량을 지원해 주는 대로 뒤따라 오게 했다.
그런데 칠흑같은 밤중에 부대를 이끌고 길이 험한 동전고개를 넘어 진동리로 진출하고 있던 나는 그 전날 아침 만경산에서 촉석루의 적 저격병으로부터 저격을 당했던 일과 만경산의 해병진지에 사격을 가했던 그 적병들이 아직은 이곳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일단 하차지점을 진동리에서 군북으로 가는 길과 진주로 가는 길로 갈라지는 분기점에서 진주 방면으로 약 2킬로 더 올라간 지점에 있는 발산재(鈴山峰)로 정하여 그 고개 일대에서 경계태세를 취하며 하룻밤을 지낸 다음 적정을 살펴가며 부대배치를 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부대지휘소는 정보수집과 비상 전화연락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 경찰지서로 정하기로 함에 따라 그 부근에 있는 고사리(姑寺里) 지서를 찾아갔는데, 그 때 시각이 8월 2일 새벽 2시경이었다.
그날 밤은 다행히 아무런 적정이 없었다. 따라서 무사히 날을 밝힐 수 있었던 나는 전투에 참가한 이래 단 한 번도 군사지도나 작전상황도를 가져본 적이 없었기에 지서 사무실 벽에 붙어 있는 관할지역 순찰지도같은 도면을 참고로 해서 이른 아침부터 지형답사를 해가면서 부대배치 계획을 세우느라 골머리를 썩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 1중대가 도착하지 않아 나는 내심으로 큰 걱정을 하고 있었다.
부대배치에 대한 나의 복안은 다음과 같이 수립되었다. 즉, 진주와 군북으로 갈라지는 그 도로 분기점 우측방의 교통요지인 개양동(開陽桐)후방의 334고지에 7중대를 배치하고, 그 334고지 북방의 428고지에 3중대, 그리고 예비대인 2중대는 428고지 동측방의 부현(夫峴)에 배치하되 날이 어두워진 다음 주민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기동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이러한 부대배치 계획을 세움에 있어 내가 2중대를 부현에 배치하게 된 것은 상황이 위급해질 경우 부대를 서북산(西北山 △738)으로 철수시키고자 함이었다. 우군부대나 상급부대와의 연락이 전혀 불가능했던 나로서는 유사시에 대비한 철수계획을 세워둘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때까지도 내가 걱정하고 있던 1중대는 도착하지 않았다. 그 후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그날 차량이 부족해서 같이 떠나지 못하고 성호국민학교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 1중대는 8월 2일아침 8시경 3대의 트럭에 분승하여 마산을 출발했으나 진동리를 거쳐 본대를 찾아오던 중 진동리 서방 약 7킬로 지점에서 고성 쪽에서 북상한 적의 공격을 받고 진동리로 철수해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새벽, 그러니까 8월 3일 새벽 4시경이었다. 밤새도록 모기떼에 시달리다가 새벽에 이르러서야 깜빡 잠이 들어 있던 나는 느닷없이 볶아대는 요란한 총성에 놀라 눈을 떴더니 3차로 우측방 고지에 배치되어 있는 7중대 쪽에서 들리는 총성이었다.
직감적으로 7중대 정면에서 무슨 상황이 터졌구나 하고 생각했던 나는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던지 전신이 와들와들 떨리는 바람에 아래턱과 위턱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수색소대장 김종식 증위가 수통 마개를따고 마셔보라고 권하기에 그것을 받아들고 별컥벌컥 마셨더니 물이 아니고 막걸리 술이었다. 그 수통에 들어 있는 막걸리를 반 통쯤 마시고 나니 비로소 덜덜 떨리던 턱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한편 통신대장 이두찬 소위가 무선통신기(SCR-300)를 가지고 7중대장 안창관 중위에게 상황을 물어본즉 7중대 2소대(장, 이병문 소위) 진지 앞으로 적의 차량부대가 다가와서 정차하기에 일제사격을 가하고 있다는것이었다. 아군의 거의 일방적인 요격은 약 30분간 계속이 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날이 밝은 다음 그 전과를 확인해 보았더니 적 사살 87명, 노획장비는 각종 차량 10여대, 기관총 3문, 따발총, 장총, 칼빈소총, M1소총 30여정이었고 아군의 피해는 부상자 6명이었다. 그리고 그 3차로 근처의 7중대 진전에서 정차를 했다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던 그 부대는 북괴군 6사단의 기동정찰부대로 판명이 되었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7시경 7중대 정면으로 와서 전과를 직접 확인하고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던 나는, 도로변에 버려져 있는 신품 미군 지프차가 얼마나 탐이 났던지 그 지프차의 핸들을 잡고 앉아 시동을 걸어 보았으나 좀처럼 발동이 걸리지 않아 2~3명의 대원이 뒤에서 밀고 있는 참이었는데 바로 그때 어디에선가 요란한 총성이 들리는 것 같더니 내가 시동을 걸고 있는 그 지프차 바로 옆 무논에 흙탕물이 탁탁탁 튀고 있는것을 목격하게 된 나는 처음에는 7중대 쪽에서 누가 총을 쏘고 있는가 해서 소리쳐 물어 보았으나 그런 사람이 없다고 말한 7중대장의 대답을 듣고서야 비로소 7중대가 배치되어 있는 바로 그 344고지의 정상에서 총을 쏘고 있는 적병들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7중대장 안창관 중위에게 그 산정의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약 1개 분대밖에 안되는 그 산정의 적이 워낙 완강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3중대가 60밀리 박격포로 지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무려 3시간 이상의 시간이 걸려서야 가까스로 적들을 격퇴시킬 수가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시간에 나는 진동리에서 도로 분기점 쪽으로 헐레벌떡 달려온 경찰관 한 사람을 접견하고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
즉 배둔리(背屯里) 지서의 경찰관이라고 말한 그 경찰관의 말에 따르면 그날 새벽 고성(固城) 쪽으로부터 북상한 적에게 배둔리 지서가 피습을 당해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다고 했는데, 그 경찰관이 부대본부에서 잠시 쉬고 있는 동안, 상황은 다시 돌변하여 그러니까 산정의 적을 격퇴시킨 7중대 대원들이 미처 산기슭으로 내려 오기도 전에 이번에는 그 도로 분기점 좌측방의 적산(積山 △490) 쪽에서 3차로 부근의 담안리 쪽으로 새로운 적이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쌍안경으로 관측해 보니 누리끼리한 군복을 입은 그 적병들의 전투모는 풀과 나웃가지로 위장이 되어 있었다.
적을 발견하게 된 나는 즉시 3중대장 이봉출 중위에게 그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 다음 나는 내 자신의 결심을 굳혔다. 아침부터 사면초가와도 같은 적정을 의식하게 된 나는 전날 세워둔 복안에 따라일단 부대를 서북산으로 철수시킨 다음 그 곳에서 정세를 관망하다가 다음 행동을 취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 전날 내가 유사시에 대비한 복안을 세울 때 진동리와 군북으로 철수하는 문제도 고려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진동리로 가게 될 경우 말이 통하지 않는 미군들로부터 적으로 오인받을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마산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함안 쪽을 택한 것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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