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5. 6·25戰爭과 海兵隊
(12) 馬山에서의 하루휴식
7월 31일 아침 10시경 진주를 떠나온 해병대가 함안군의 군북(群北)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4시경이었다.
그 전날 오후 5시경부터 그날 새벽녘까지 계속된 철야전투로 대원들은 극도로 지쳐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진주에서 군북에 이르는 그 70~80리 길을 행군해 오는데 그만큼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이었다.
부대가 군북에 도착했을 때 마침 군북역에 한 량의 화차가 있었기에 지휘본부와 중화기를 비롯한 일부 병력과 장비는 그 화차를 이용하고 나머지 병력은 진해 통제부에서 지원해준 트럭(2대)에 분승하여 마산으로 향했다.
부대가 숙영지인 마산 성호(城湖)국민학교에 집결 완료한 시각은 그날 오후 7시경이었다. 해병들이 그 곳에 도착했을 때 마산시장과 애국부인회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몰려와서 푸짐한 위문품과 음식으로 정성껏 대원들을 위로하고 환영해 주었다. 그리고 그날 하룻밤만은 그야말로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원수같은 잠들을 잘 수가 었었다.
한편 마산에 도착하게 되었던 나는 그때 비로소 군사정세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를 어렴풋하게나마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남원에서 마산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보도매체들이 전혀 없어 모든 것이 깜깜했었는데 마산에 와서 잠시나마 신문도 훑어 보고, 또 접촉한 사람들로부터 이런저런 얘기를 귀담아 듣고 보니 비록 절박한 상황이긴 했지만은 앞못보던 장님이 시력을 회복하고 듣지 못하던 귀머거리가 청각을 회복한 것처럼 속시원한 마음으로 상황을 직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마산과 창원도 위험하고 진해도 위험하다는 말도 있었지만 유엔군의 결정태세도 결코 만만치가 않다는 느낌이 들었던 나는 전쟁에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가 있었다.
8월 1일 아침 성호국민학교의 숙영지에는 육군의 창군원로인 이응준(李應俊·일본군 육군대좌 출신) 소장과 이종찬(李鍾贊·일본군 육사 출신) 대령이 찾아왔었는데, 자신이 서부지구 전투사령관이라고 칭한 이응준 소장은 지금부터 해병대가 서부지구 전투사령부의 휘하에 재편입되었다는 사실을 통고해 주면서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다.
이응준 장군과는 전혀 면식이 없는 사이가 아니었다. 이미 나의 입대배경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이 장군은 내가 정일권(T--權)씨의 권유에 따라 육군에 입대하기 위해 정일권씨와 함께 통위부(統衛部)에 갔을 때 나에게 육군소위의 입관장을 써준 바로 그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미 군정청의 미군 책임자는 프라이즈 대령이었고 한국군 책임자는 이응준 장군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장군의 말이 못미더워서가 아니라 그런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 마산 해군헌병대를 통해 해군본부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더니 사전에 통고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우리 부대의 건투를 빈다고 했다.
남원(南原)에서 서부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 되었던 해병대는 그 후 진주(雷州)에 도착하여 작전상 미육군 24사단 19연대로 일시 배속이 변경된 것이었는데, 그 후로는 전혀 소식이 감감하다가 그 날 비로소 배속부대와 접촉을 갖게 되고 또 전투사령부의 사령관(전임 사령관 申泰英 소장)과 참모장(전임 참모장 元容德 준장)이 교체된 사실도 알게 되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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