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5. 6·25戰爭과 海兵隊
(9) 雲峰·威陽地區戰鬪
구곡양장과도 같은 고갯길을 구비구비 휘감고 있던 그 엿가락같이 늘어진 행군대형이 펑퍼짐한 운봉고개 정상에 집결 완료했던 시각은 그 날(24일) 오후 2시경이었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대원들의 모습을 보니 얼마나 땀에 젖고 지쳐 있었던지 흡사 빈사지경에 이른 물귀신같은 몰골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러한 모습을 대하면서 나는 우리 해병들에게는 남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해낼 수 있는 불굴의 감투정신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든든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행군대형의 맨 후미에 서서 고지 위로 올라갔을 때 때마침 그 근처에 앉아 있던 신태영 사령관은 나를 쳐다보며 "김 중령 수고했소" 하는 위로의 말을 건네더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고갯길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 쪽으로 1개 중대, 이 쪽에 1개 중대를 배치하여 그 고개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한편 그날 저녁 해병들은 간장과 소금을 넣고 삶은 주먹크기만한 쇠고기 덩어리 하나씩을 먹고 그 전날 저녁부터 굶어왔던 허기진 배를 조금이나마 채울 수가 있었는데, 그 쇠고기는 쌀이나 보리쌀을 구할 수가 없었던 보급관 이원혁 중위가 황소 한 마리를 구입해서 장만한 것이었다.
그 다음 날 아침 해병대는 오덕준 부대와 함께 운봉지구에 대한 방어에 임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2중대를 예비대로 남겨 두고 다른 중대들은 1304고지 등 운봉 서방에 있는 고지에 배치하여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이날 아침 운봉국민학교에 위치하고 있던 7사단 본부에서는 서부지구 전투사령부 산하부대 지휘관들이 합석한 작전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그 회의 도중 우군기의 오폭(誤爆) 사고가 발생하여 회의를 무산시키고 말았다.
그날 아침 그 국민학교 교정에는 100여 명의 병력(육군과 해병수색소대)과 육군부대의 탄약차 1대가 주차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그 곳으로 출격 중에 있던 우군기(F51) 한 대가 우리 군인들을 북괴군으로 오인하여 오폭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래서 회의는 회의대로 무산이 돼어 버리고 군인들은 군인들대로 혼비백산하고 말았는데 그러한 와중에서도 몇몇 해병 수색소대 대원들은 죽음을 무릅쓴 과감한 행동으로 우군부대(육군)의 실탄 상자에 붙어 있는 불을 꺼서 하마터면 가공할 연쇄폭발사고를 일으킬 뻔했던 아슬아슬한 위기를 모면케 한 감동적인 진중일화를 남겼다.
정작 그 일을 했어야 할 사람들은 육군 병사들인데 목숨들이 아까워서 달아나 버린 그들을 대신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그 일을 해내었던 수색대원들의 행동은 그들이 해병이었기에 해낼 수 있었던 살신성인과도 같은 행위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24일부터 운봉지구에 대한 방어전을 수행하고 있던 서부지구 전투사령부 산하의 모든 부대는 27일 정오경까지 함양으로 철수했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에서 맨 처음 운봉 서방 일대의 고지에 배치되어 있던 해병대의 주력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던 적정으로 인해 26일에는 운봉 동방1킬로 지점에 있는 목장(종우장)으로 이동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가 약2시간 후에는 그 곳에서 다시 운봉 동쪽 약 10킬로 지점의 팔령재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고, 또 허둥지둥 팔령재로 달려가자마자 이번에는 1개 중대(3중대)를 팔령재에 남겨 두고 함양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게 됨으로써 오로지 도보에만 의존할 수밖에 있었던 연속적인 부대이동으로 대원들은 말할 수 없는 고역을 치렀다.
그리고 함양으로 철수하게 된 서부지구 전투사령부는 그 때 이미 함안동북방의 거창(居昌)과 안의(安義)를 점령한 적이 함안 동쪽 약 6킬로 지점까지 육박해 오고 있는 형세였으므로 그 적을 저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급한 과제였다. 그 적은 대전에서 금산을 거쳐 안의로 침공한 북괴군 4사단이었다.
따라서 나는 7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1개 중대(3중대)를 팔령재에 남겨둔 채 26일 아침 7사단의 예비중대로 전정된 7중대를 제외한 병력을 이끌고 안의(함양군, 함양 서쪽 8킬로 지점)를 향해 출동을 했으나 가는 도중 적이 함양 동북방 약 4킬로 지점까지 육박해 오고 있었으므로 오후 3시경 나는 2중대와 1중대를 함양에서 안의에 이르는 그 도로 좌측방 고지(도로 우측방 고지에는 7사단 산하의 김병화 부대가 배치되어 있었던것으로 알고 있다.) 일대에 전개시키고 수색소대는 그 고지 좌전방에 있는 백운산(百雲山)을 점령하게 했는데, 그 백운산에는 경찰부대가 배치되어 있는 듯해서 부부대장 김병호 대위를 수색소대장과 동행시켜 그 경찰부대를 통합 지휘하도록 조처했다.
그런데 아군의 저지선 상에서 전투가 벌어졌던 시각은 오후 5시경이었다. 1, 2중대가 배치된 고지 전방에서 적이 공격을 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 나는 마치 꿩새끼 떼처럼 논두렁으로 각개약진을 하며 내가 있는 전방으로 접근해 오고 있는 소수의 적병들을 목격하고는 그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기 인민군이 있다. 저놈들을 쏴라!" 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옆에 있던 경기관총 사수가 그들을 확인하곤 불벼락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총열이 시뻘겋게 달아 오르자 그 총열을 식히기 위해 겁도 없이 그 자리에 선 채 그 총열 위에 마구 오줌을 싸갈긴 다음 다시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비록 처절한 공방전은 아니었지만 나로서는 군에 입대한 이래 처음 치러본 전투였다. 따라서 나는 한편으로는 신명도 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 적에게 포위를 당하는 변이라도 생기면 어찌나 해서 마음이 불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시기에 때마침 그 곳에 나타난 보급관 이원혁 중위는 인민군이 어디 있냐며 겁도 없이 기관총 진지 뒷 쪽으로 다가서다가 화기소대장 이홍균 소위에 의해 뒤로 끌어당겨지고 말았다. 그는 장항·군산지구 전투에도 참가했으나 해양대학 취사장에서 밥짓는 일 돌보느라 인민군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도 볼 기회가 없었다면서 적을 보고 싶어 했으나 화기소대장이 "그렇게도 저승으로 가고 싶소?" 하며 고개를 처 들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결국 그 소원을 성취하지 못했다고 한다.
땅거미가 질 무렵이 되자 내가 위치한 지휘소 전방 약 30미터 지점에서 요란한 따발총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고, 날이 조금 더 어두워졌을 때는 불과 10여미터 전방에 적의 수류탄이 폭발하는 등 상황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시기에 고지 후사면에서 발사한 81밀리 박격포탄이 무엇을 명중시켰는지는 모르나 적진에서 굉음과 함께 화재가 일어난 뒤로부터 갑자기 상황이 잠잠해지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 때 불현듯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만약에 적이 함양에서 운봉과 안의 및 산청으로 뻗어 있는 그 삼차로의 분기점 후방, 즉 함양에서 산청으로 가는 그 도로의 길목을 차단하기라도 한다면 전방에 있는 아군 병력은 적에게 포위되어 전멸을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비록 사단본부로부터는 아무런 기별이 없었지만 즉시 병력을 철수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나는 지휘소에 대기하고 있는 수색소대의 전령을 보내어 철수를 서두르게 했는데 바로 그 시각에 함양국민학교의 7사단 본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7증대장 안창관 중위가 대원들을 이끌고 헐레벌떡 다가와서는 7사단이 벌써 산청으로 도망가 버리고 없는데 왜 혼자서 여기를 지키고 있느냐고 했다. 그리고 7중대장과 함께 도착한 7중대 2소대장 이병문 소위는 성급하게도 적이 어디 있느냐며 경기관총을 거치하기가 무섭게 전방을 향해 마구 실탄을 날려 보내기에 적도 안보이는데 왜 실탄을 낭비하느냐고 하며 사격을 중지시켰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 시각에는 도로 우측방 고지에 배치되어 있던 육군부대(김병화 부대)의 정면이 철수를 해버렸는지 잠잠한 것을 느꼈다.
7사단이 산청으로 다 도망가 버렸다고 한 안창관 중위의 말에 따르면 7사단 본부가 산청으로 철수할 때 운봉 팔령재에 남아 있는 3중대에 산청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린 다음 예비중대인 7중대도 함께 데려 가려고 했으나 7중대장이 "전방에 나가 싸우고 있는 우리 해병대가 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억케 그럴 수가 있갔소! 내래 우리 대장 있는 데로 가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갔소다" 하며 불응하는 바람에 단념을 한 것이라고 했고, 또 그날 낮 함양국민학교 교정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고 했다.
즉, 전방에 나가 있는 우리 부대의 일이 걱정이 되어 견ELF 수가 없었던 7중대장이 7사단 작전참모 이용 소령을 붙들고 좀이 쑤셔서 더 이상 앉아 있지 못하겠으니 해병대가 있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간청을 하자 처음에는 예비병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좋게 거절을 했으나 두 번, 세 번 구차스럽게 졸라대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지 마침내는 권총을 뽑아들고서는 "당신 정말 이러기요?" 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바로 그 다음 순간 그는 찰가닥 하는 쇠붙이 소리가 나는 등 뒷 쪽을 돌아보기 무섭게 권총을 손에 든 채 황망히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고한다.
등 뒷 쪽에서 들린 그 쇠붙이 소리는 학교 운동장 옆 언덕빼기에 기대앉아 시종 중대장을 지켜보고 있던 7중대 대원들이 이 소령이 권총을 뽑아 드는 것을 보고 일제히 M1소총의 노리쇠를 작동(후퇴-전진)시킨 바로 그 소리였다고 한다.
그런데 수색대에 전령을 보낸 후 약 1시간이 경과되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대신 멀리서 들리는 요란한 총성과 함께 백암산에서 발사하고 있는 빨간 예광탄 불빛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북쪽으로 날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창 전투가 치열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두 번째의 전령을 보낸 데 이어 또 한 차례 부대 인사관 이영호 소위를 백암산으로 보냈으나 새벽 3시경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기에 이영호 소위를 보낼 때 3시경까지 기별이 없으면 먼저 철수를 하겠으니 기회를 잘 봐서 안전하게 철수하라는 말을 부부대장과 수색소대장에게 전하라고 했으니 그렇게 할 것으로 믿고 7중대와 1, 3중대순으로 철수를 개시했다.
지리산의 험한 산길을 헤치며 가야만 했던 함양-산청 50리 길은 말할 수 없이 고달프고 고통스러운 길이었다. 그 험한 길을 지칠대로 지친 몸들을 이끌고 꾸벅꾸벅 졸면서 걸어가고 있던 해병들의 몰골이란 한 마디로 빈사지경에 이른 패잔병들과도 같았다.
7월 23일 아침 여수에서 남원역에 도착한 후 함양에서 산청으로 철수하는 그 시각에 이르기까지 해병들은 단 한 차례 남원에 도착했던 그날 밤 기차로 남원역에서 오수역을 내왕했던 경우를 제외하곤 단 한 번도 열차나 자동차를 타본 적이 없이 오로지 보행에 의한 이동만을, 더구나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끼니도 잇지 못한 채 거듭해 왔으므로 그 피로도란 가히 극도에 달해 있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날이 뿌옇게 새고 있는 험한 도로변에는 죽은 듯이 고꾸라져 있는 대원들이 10여명이나 되었다. 나무칼로 귀를 베어가도 모를 만큼 깊이 잠에 골아 떨어져 있는 그들이었다.
지칠대로 지친 나 자신이 그들을 하나하나 깨워서 데려간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나는 길가에 있는 가로수인 백양나무 가지를 꺾어들고서는 회초리로 그들을 사정없이 내려갈겼다. 처음에는 아이를 매질하듯 때려 보았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방법으로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자들에게는 대원들이 구둣발로 엉덩이를 걷어차거나 귓볼이나 코를 마구 잡아채기도 하여 기어이 정신을 차리게 하고야 말았다. 그런 일을 생각하니 6월 28일 새벽 북괴군이 전차부대를 앞세우고 미아리 고개의 아군 전선을 돌파하고 있는데도 그 고개 위에 배치되어 있던 아군 병사들이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에 골아 떨어져 있었다는 장면이 새삼 연상된다.
또한 60리 길을 패잔병처럼 그렇게 걸어가고 있는 동안 나는 도로변에 버려져 있는 여러 대의 고장난 트럭을 목격했는데 육군이 버리고 간 트럭 위에는 필시 군수물자임이 분명한 물품들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내가 산청에 도착한 시각은 28일 아침 7시경이었다. 집결지는 산청국민하교 교정이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태산같은 걱정이 있었다. 밤새 마음을 놓지 못한 수색소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3시간 후 그처럼 신경이 쓰이던 수색소대 대원들이 산청에 도착하게 됨으로써 태산같던 걱정이 싹 가셔지고 말았다. 수색소대장 김종식 중위의 보고에 따르면 적에게 포위를 당해 있었기 때문에 그처럼 철수가 지연된 것이라 했고, 또 부부대장 김병호 대위가 포위된 상황 속에서도 계속 기관총을 쏴대는 바람에 화기진지의 노출로 그만큼 철수에 지장이 초래된 것이라고 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해병대 사령관 글 > 4대사령관 김성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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