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5. 6·25戰爭과 海兵隊
(7) 全州 攻擊命令
전투사령부에 들러 신태영 사령관과 참모장 원용덕 준장, 그리고 7사단장 민기식 대령에게 도착신고를 했던 나는 신태영 사령관으로부터 전주(全州)를 공격해서 탈환하라는 구두명령을 받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즉, 적이 광주를 점령했는지 순창을 공격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전주를 공격해서 탈환할 수 있을 것이며, 유엔군과 국군이 전 전선에 걸쳐 지연전을 하며 철수하고 있는 이 마당에 유독 조그마한 병력을 가진 해병대만이 그런 무모한 공격을 해야 되는지 그 작전의 목적을 좀 설명해 달라고 했다. 그리곤 불명한 적정 하에서 무모한 작전을 하느니 차라리 이곳에 병력을 집결시켜 남원을 지키는 것이좋지 않겠냐는 진언도 했다.
그랬더니 일본군 육군 대좌출신인 신태영 사령관은 내 말이 몹시 당돌하게 여겨졌던지 불쾌한 어조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일이지 해병대는 왜 그렇게 말이 많으냐" 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이상의 말은 삼가하고 그 대신 해병대에 Ml소총의 실탄과 클립, 그리고 단 한 대라도 좋으니 탄약과 보급품을 싣고 다닐 차량을 좀 빌려달라고 했더니 비정하게도 그 요청마저 묵살해 버리는 것이었다.
더구나 신태영 사령관은 내가 육군참모학교에 입학할 때 육군참모총장으로서 훈시를 한 분이었고, 민기식 부대장은 당시 시흥 보병학교 교장으로 재임했던 분, 그리고 참모장 백남권 중령은 그 당시의 동문수학생(동기생)이었는데도 그런 박대를 받고보니 마치 내가 육군부대의 머슴살이를 하러 온 사람같이 여겨지는 바람에 야속한 점이 머리 끝까지 확 치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만약에 전투사령부의 사령관이나 참모장이 해군장교라고 한다면 나의 의사나 요청을 이렇게 묵살하진 않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모군(母軍)에 대한 정을 간절하게 느끼기까지 했다.
한편, 전주에 대한 공격명령을 지키기 위한 나의 복안은 이러했다.
즉 그날 밤 열차 편으로 오수(獒樹)역에 도착한 다음 다음 날 아침 6시를 기해 기동을 하여 임실(任實)을 거쳐 전주를 공격하되 가급적이면 적정을 살펴가며 천천히 행동을 하다가 유사시에는 병력을 안전하게 철수시키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목적도 있는 전투에서 전멸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고, 또 그렇게 하는 것만이 해병대의 살 길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나는 전장에서의 승리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날 밤 기차로 오수역에 도착했던 시각은 자정이 다 된 무렵이었다. 오수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대원들을 하차시키기에 앞서 수색대장(김종식 중위)에게 지시하여 기관사를 꼼작 못하게 감시하도록 했다. 만약에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기관사가 달아나 버리거나 그 기차를 몰고 가버릴 경우 무슨 변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원들을 시켜 기관차 내부에 있는 화덕에 계속 석탄을 퍼넣어 불을 지피라고 했다. 유사시엔 하시라도 타고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열차에서 내린 대원들이 오수역을 중심으로 경계태세를 취하는 가운데 모기떼에 뜯기며 선잠을 자고 있을 때, 그러니까 오수역에 도착한 지 약 1시간 남짓한 시간이 경과되었을 무렵 남원의 전투사령부에서는 오수역사의 전화기를 통해 다음과 같은 긴급지시를 했다.
즉 광주(光州)가 떨어지고 순창(淳昌)이 떨어졌으니 곧 남원도 떨어질 것이라면서 즉시 기차를 타고 남원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지시를 받게 된 나는 수색소대장으로 하여금 기관사를 잡아 두게 했던 일과 기관차의 화덕에 석탄을 퍼넣어 계속 불을 지피게 한 것도 잘 한 일이었고, 숙영지를 오수역 근처에 정했던 일과 성급하게 임실을 향해 야간행군을 하지 않고 그 다음 날 아침 6시를 기해 공격을 개시할 생각을 했던 그 모든 일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해병들이 탄 열차가 오수역에서 남원역으로 되돌아간 시각은 23일 아침 6시 경이었다.
그런데 남원역에 내려 역사 밖으로 나와 본 나는 그 때 이미 남원 근교에 적의 포탄이 꽝꽝 떨어지고 있고, 광주와 순창 방면으로부터 육군과 경찰이 탄 트럭이 남원을 거쳐 운봉 쪽으로 질주해 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어느새 정세가 이렇게까지 악화되었는가 싶어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순간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만약에 내가 그 전날 밤 오수역에서 머물러 있지 않고 전주를 공격하기 위해 떠나고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것이었는데, 생각이 거기에 미쳤을 때 나는 갑자기 모골이 송연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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