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5. 6·25戰爭과 海兵隊 (8) 南原에서 雲峰까지

머린코341(mc341) 2014. 7. 20. 12:52

국방의 멍에 - 5. 6·25戰爭과 海兵隊

 

(8) 南原에서 雲峰까지

 

  아침 9시경에 이르러 나는 철수 준비를 서두르고 있던 서부지구 전투사령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명령을 받았다. 즉, 첫째는 남원 동북방에 있는 고지 위에 흰 옷을 입은 수백 명의 피난민이 우글거리고 있는데, 그 피난민들 가운데 적 오열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니 그들을 검색하여 오열을 색출하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그 피난민들을 그 자리에 묶어둔 채 운봉으로 철수하는 육군과 경찰부대를 그 고지 위에서 엉호하라는 것이었다.

 

  명령을 받은 나는 즉시 2중대장(김광식 중위)와 3중대장(이봉출 중위)로 하여금 그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고 예비대인 7중대와 화기중대인 1중대장(한예택 중위)는 내가 위치하고 있어야 할 남원역 부근에 배치해 두었다.

 

  그런데 오전 8시경이 되자 상황이 다소 급박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쿵쿵거리고 있던 포성이 점점 가까워지는 듯 했고, 굉음을 터트리고 있는 포탄의 탄착지점도 눈에 띠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경황속에 마치 몰이꾼들에 쫓겨 달아나고 있는 짐승들과도 같이 무수한 트럭들이 그 포탄에 쫓겨 광주 방면에서 남원을 거쳐 운봉고개로 내닫고 있었다.

 

  광주 방면에서 남원을 거쳐 운봉고개로 내닫고 있는 무수한 트럭 위에는 싸움도 한 번 해보지 못한 듯한 육군 병사들이 빽빽히 타고 있었다. 그러한 광경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즉 신태영 사령관에게 차라리 남원이라도 지키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했던 그 말을 떠올리면서 국민이 태산같이 믿고 있는 우리 국군, 더구나 저렇게 많은 병력이 용감하게 버티고 서서 사생결단을 해볼 생각은 않고 포수의 총소리에 놀란 참새떼처럼 저렇게 겁을 집어 먹고 황망히 달아나기에 급급하니 저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전쟁에 이길 수가 있을 것인가 싶었던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주해 가고 있던 수백 대의 트럭이 자취를 감춘 시각은 그 날 오전 9시경이었다. 그 사이에 육군 서부지구 전투사령부와 그 예하의 모든 병력도 남원을 빠져나가 버리고, 천애(天涯)의 고아처럼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해병대 뿐이었다.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던 나는 서둘러 부대본부에 대기시켜놓은 2중대와 3중대의 전령을 본대로 보내어 2중대와 3중대가 위치하고 있는 그 고지 쪽에서 운봉고개로 철수하라고 했다. 그리고 부대본부와 1중대, 7중대 수색소대 순으로 철수를 개시했고, 나는 맨 후미에 위치하고 있었다.

 

  운봉고개로 올라가기 전 수색소대장 김종식 중위와 7중대장 안창관 중위는 자기네들이 뒤를 지키며 올라갈테니 나를 먼저 올라가라고 했으나 나는 내가 맨 뒤를 따를테니 7중대에서 경기관총 2정을 수색소대에 배속시켜 나와 함께 후미에 있게 해달라고 했다. 적이 추격해 올 경우 그 기관총으로 적을 격퇴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행군부대의 맨 후미에 위치하고 있겠다고 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즉, 첫째는 대원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지휘관이 되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용장(勇將) 밑에 약졸(弱卒)이 없다는 말이 있듯 겁이 많은 지휘관이 아니라 용감한 지휘관이 됨으로써 부하대원들의 용감성을 길러주기 위함이었다.

 

  남원에서 운봉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강릉으로 넘어가는 대관령 고개처럼 굴곡이 심한 고개인데, 그 험난한 고개를 7월 하순의 푹푹 찌는 더위속에 도보로 올라가야만 했던 해병들의 고충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무거운 중기관총 몸통이나 박격포의 포판 등을 어깨에 맨 화기중대(1중대) 대원들의 고충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느슨하게 늘어져 있던 행군대열은 마치 뙤약볕에 녹아난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져 차츰 선후 중대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뒤섞여 있었고, 고통으로 일그러진 대원들의 얼굴은 비지땀과 흙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맨 후미에서 땀을 주룩주룩 흘리며 한참 동안을 올라가고 있을때 고지 윗 쪽에서 내려온 지프차 한 대가 내 곁에 정차하기에 무슨 일인가 해서 눈여겨 보았더니 그 차의 앞 좌석에 타고 있던 백남권 참모장이 "김 중령 이런 고생 시켜서 미안하오" 하며 함께 타고 가자고 했고, 그 뒷 좌석에 앉아 있던 작전참모 이용  소령도 앉은 자리를 좁히면서 어서 타라며 권유했다.

 

  그러나 애당초 그럴 기분이 아니었던 나는 빈정대는 말투로 "미안하긴 뭐가 미안하겠소" 하며 나는 대원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기로 작정을 했으니 그렇게 알고 먼저 올라가라고 했다. 그러자 입장이 난처해진 듯한 백남권 참모장은 그 전날 내가 차를 좀 빌려달라고 했을 때 요청을 들어주지 못했던 일을 사과하면서 자기 체면을 생각해서라고 같이 타고가자고 했으나 나는 끝내 사양하고 말았다. 나는 그 때 발에 물집이 생겨 신고 있던 반장화를 목에 걸고 맨발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민기식 부대의 참모장 백남권 중령과 작전참모 이용 소령이 타고 있던 지프차는 내가 운봉고개 중턱으로 올라갈 때까지 그 후에도 두 번이나 다녀갔었지만 그 때는 내가 빈 트럭을 한 대 내려 보내어 일사병에 걸려 낙오가 되고 있는 대원들을 좀 실어다 달라고 했더니 그러한 요청은 들어주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일과는 상관없이 그날 나를 태워가기 위해 세 번이나 그 고갯길을 왕복했던 그 두 분에 대한 고마운 정만은 지금도 잊지 않고있다. 그 때 지프차에 함께 타고 있던 이용 소령은 내가 보병학교에 입교해 있을 때 전술학 교관으로 있었던 사람이었고 후일 소장의 계급으로 예편했으며 성우회(星友會)의 사무총장으로도 재임했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