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6. 진동리 지구 전투 (4) 4日間의 血鬪

머린코341(mc341) 2014. 7. 25. 21:08

국방의 멍에 - 6. 진동리 지구 전투

 

(4) 4日間의 血鬪

 

  해병대의 첫 공격명령이 내린 날짜는 8월 10일 오전 10시경이었다. 명령의 요지는 강력한 적이 점거하고 있는 진동리 서북방의 베틀산(△435)과 야반산(△342), 368고지, 수리봉(△567) 및 제일 높은 고지인 서북산(△738)을 공격, 점령하라는 것이었다.

 

  명령을 수령한 나는 우일선에 배치된 2중대로 하여금 베틀산을 공격점령한 다음 서북산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도록 하고 중앙에 배치한 3중대는 야반산(夜半山)과 수리봉(驚峰), 그리고 좌일선 중대인 7중대에는 야반산 좌측방에 있는 368고지에 대한 공격임무를 부여한 다음 오후 1시를 기해 작전을 개시했다. 부대 지휘소는 3중대와 함께 위치했고, 대공표지를 하라는 지시에 따라 일부 공격소대 대원들의 등에 흰 광목천을 매달거나 비틀어 매었는데, 광목천은 부대보급관 이원혁 중위가 함양(咸陽)에서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빈 부자집 민가를 수색하다가 입수한 것이었다. 보급관이 광목천을 확보해 두었던 것은 운봉국민학교에서 우군기의오폭사고가 발생한 후 대공표지판을 마련해야겠다는 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격에 임한 대원들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다. 민가에 자리잡고 있던 부대본부의 취사장이 습격을 당해 전날 저녁 때부터 식사를 하지 못한데다 그날 새벽녘에 치른 전투로 매우 지쳐 있었고, 또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무서운 더위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원들은 기어코 임무를 완수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으로 죽을힘을 다해 전투에 임한 끝에 베틀산을 공격했던 2중대는 그날 오후 6시 30분경 최종목표인 서북산(西北山)까지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야반산을 공격했던 3중대도 오후 3시경 그 고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368고지를 공격했던 7중대는 임무를 완수한 다음 적과 대치 중에 있었다.

 

  그런데 3중대가 공격했던 야반산은 8월 7일 그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미 육군 5연대전투단 제2대대와 교체부대로 투입이 된 미 해병들이 강력한 적과 피비린내 나는 공방전을 별였던 곳이었다. 따라서 그 현장에는 피아군의 시체가 도처에 발견되었다. 푹푹 썩어가고 있는 미군들의 시체들은 하나같이 통통 부어 올라 특히 빵빵하게 팽창해 있는 복부는 당장에라도 픽픽 소리를 내며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가 목격했던 미군들의 시체 중에는 나무 등걸이나 돌바위에 기대앉아 죽어 있는 시체도 여러 구 있었는데 그들 미 해병의 철모 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본 나는 직감적으로 그 구멍들이 미 해병대의 콜세아 전폭기의 기관포탄에 맞아 생겨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섬찟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미군들의 시체를 목격한 대원들 중에는 견딜 수 없는 갈증 때문에 그 시체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수통을 끌러 그 속에 남아 있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대원들도 있었고, 철모와 손목시계를 벗기거나 호주머니를 뒤져 낮선 지폐(미국 달러)를 꺼내 들고 신기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수통이 없어 올챙이 새끼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따뜻한 논물을 마시며 전투를 해왔던 대원들은 그 때부터 수통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휴대해 다녔고, 또 식기도 세숫대야도, 양동이도 갖지 못하고 있던 대원들은 철모를 가지고서 그러한 용도에 효과적으로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들의 호주머니 속에서 꺼낸 지폐는 돈을 탐하면 재수가 없다는 말이 돌아 단 한 사람도 그것을 챙기는 자가 없었다.

 

  야반산에서는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즉 복부에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던 흑인병사 하나가 통증을 견디기가 어려웠던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슈트 미, 슈-트 미" 하며 자기를 쏴 달라고 애원을 하다가도 막상 누군가가 그의 애원을 들어주려고 총뿌리를 겨누자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노우 ! 노우!" 하며 별떡 일어나 허둥지둥 고지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한편 야반산을 점령한 3중대는 계속해서 수리봉을 공격했으나 고깔모자의 윗 부분같이 뾰족하게 생긴 수리봉 정상 부위에 구축된 적 기관총진지와 박격포의 탄막사격 및 암벽을 타고 굴러내리는 수류탄 등으로 인해 공격이 좌절되고 말았다.

 

  더구나 공격 벽두에 소대장 김성대 소위와 김한수 소위 등이 부상을 당해 덜렁거리는 팔을 잡고 내려오고 있는 것을 목격했던 나는 저 기관총을 침묵시키지 않고서는 점령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3중대장과 화기중대장에게 60밀리 박격포와 81밀리 박격포로 공격해보라고 했으나 정확성이 결여되어 좀처럼 명중을 시킬 수가 없었다. 내가 직접 81밀리 포진지로 내려가서 좌로 더하기 얼마, 우로 더하기 얼마하며 사격지휘를 해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미군들이 보유하고 있는 2.36인치 바츄카포나 57밀리 대전차포, 75밀리 무반동포 같은 무기가 생각났다.

 

  만약에 그러한 무기가 있다면 저런 기관총쯤은 문제없이 침묵시킬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한 무기의 위력에 대해서는 내가 육군참모학교 고급반에 입교해 있을 때 육군보병학교에서 받은 화기시범 교육 때 그 위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일로 공격이 중단되고 있을 때 중화기중대 81밀리 박격포 진지 근처의 밭뙈기에 앉아 적진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내가 앉은 그 위치와 수리봉 정상과의 직선거리가 눈대중으로 약 5OO~600미터는 되는것 같아 바로 옆에 앉아 있는 1중대(화기중대)장 한예탁 대위에게 무심코 이런 말을 했다. 즉 "절마아들(인민군) 총알 여기서 맞아도 죽을까?" 하는 말이었는데, 나의 그런 말에 한 대위는 통명스럽게 "아 맞아만 보시오. 천당 안 가는가" 하고 대꾸했다.

 

  그런데 옛 말에 호랑이 얘기를 하면 호랑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생각나게 하듯 한 대위의 대꾸가 끝나기가 무섭게 갑작스럽게 발사된 적 기관총탄이 세 사람이 앉아 있는 곳을 향해 빗발치는 바람에 세 사람은 거의반사적인 행동으로 가까이에 있는 밭두렁 밑으로 뛰어갔는데 바로 그 때 몸놀림이 민첩하지 못했던 화기소대장 이홍균(李弘均) 중위(준장 예편)가 무슨 변을 당했는지 꼼짝을 못한 채 "어? 맞았어. 내가 맞은 것 같애." 하며 그의 왼쪽 가슴 쪽에 오른 손을 갖다대고 있었다.

 

  그래서 밭두렁 밑으로 뛰어왔던 화기중대장이 잽싸게 달려가서 그를 부축해 와서는 "정말 한 방 얻어 맞았어?" 하며 다친 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가슴팍으로 뚫고 들어간 총알이 폐를 지나 옆구리 쪽으로 차고 나간 것이었다.

 

  한데 그때서야 출혈과 함께 심한 통증을 느끼기 시작한 이 중위에게 중대장 한예택 대위는 저고리 윗주머니에서 화랑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붙여 물려주며 미련스럽게 이런 농담을 했다. 즉 총알이 몸 안에 박혀있는지 맞구멍을 내고 차고 나가 버렸는지 담배를 한 모금 빨아 그 연기를 총알 맞은 곳에 뿜어보라는 것이었다.

 

  그날 중상을 입은 이홍균 중위는 아군 함정이 배치되어 있는 진동만(鎭東灣)으로 후송되어 그 곳에서 다시 진해로 이송되어 해군병원에 입원했다. 9월 초 이 중위는 병원장(김기전 중령)의 반대를 무릅쓰고 완쾌도 되기 전에 무단으로 병원을 뛰쳐 나와 그 길로 통영상륙작전을 마치고 원문고개(통영)에 배치되어 있는 원대에 복귀했다. 성치 못한 몸으로 원대에 복귀하게 된 연유는 고장난 박격포를 수리하기 위해 진해 해군공창을 찾아갔던 화기소대 선임하사관 이창수 상사와 이 중위의 전령으로 있던 대원이 문병차 병원에 들러 모든 소대원들이 학수고대하고 있으니 하루속히 돌아와 달라며 간청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중위가 후송당한 후 화기소대는 소대 선임하사관으로 있다가 특진한 이기덕 소위가 지휘하고 있었다.

 

  한편 그날 8월 10일 오후 5시경 우군의 전폭기 편대가 적진을 공격했으나 적병들이 암석지대로 숨어들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를 못했다.

 

  그리고 그날 3중대와 7중대의 공격은 오후 7시경까지 계속되다가 중단이 되고 그 다음 날 아침 8시를 기해 공격을 재개한 끝에 3중대는 오후1시 30분경 수리봉을 점령하고, 7중대는 우군 포대의 지원 하에 368고지에서 오후 1시 40분경 그 목표고지를 점령했다. 수리봉전투에서 생포한 포로병들 3명의 말에 따르면 전사(戰士)들은 거의 다 죽고 군관(軍官)들만 남아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임무를 완수했던 나는 25사단의 작명에 따라 각 중대가 점령하고 있는 고지들을 미 25사단 소속부대에 인계하고 현지에 집결해 있다가 그 다음 날 12일 아침 8시경부터 진동리의 집결지로 이동하여 된장이 발린 주먹밥 한 덩어리씩을 먹은 다음 10여대의 트럭에 분승하여 중암리(中岩里)로 이동했다.

 

  우리 부대에 내린 미 25사단의 새로운 작명은 우군부대(25사단 소속)와 협동하여 남쪽에 있는 오봉산(五峯山)과 필봉(筆峰)의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이었다. 그 당시 오봉산과 필봉 일대에는 약 2,000명의 적 패잔병이 집결해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었다.

 

  공격개시 시간은 오후 2시 30분이었고, 필봉을 맡은 우군부대는 우리부대의 좌측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나는 2중대를 좌일선에 배치하여 오봉산의 목표 A를 공격하게 했고, 3중대를 우일선에 배치하여 목표 B를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 예비대인 7중대는 부대 지휘소가 있는 사촌리(沙村里)에 위치하게 했다.

 

  우군 항공기와 포병의 지원 하에 공격을 개시한 2중대와 3중대는 서서히 목표를 향해 전진한 끝에 2중대는 오후 6시 20분경 목표 A를 점령하고 3중대는 2중대의 지원 하에 목표 B를 무난히 점령했는데, 그 전투에서 우리 부대는 19명의 적을 사살하고 약간의 무기를 노획한 반면 3명의 전사자와 12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