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6. 진동리 지구 전투 (5) 킨 部隊의 解體

머린코341(mc341) 2014. 7. 25. 21:09

국방의 멍에 - 6. 진동리 지구 전투

 

(5) 킨 部隊의 解體

 

  8월 7일부터 개시된 킨 특수임무부대의 반격작전이 7일째로 접어들고 있던 13일 아침이었다. 나는 A·B 목표를 확보하고 있는 그 상태에서 즉시 진지를 우군부대에 인계하고 민기식 부대와 같이 기차로 대구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미 25사단에서 그러한 명령을 내리게 된 것은 8월 13일을 기해 반격작전을 증지하고 방어작전으로 전환하라는 미 8군사령관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8군에서 그와 같은 명령을 내리게 된 배경 요인은 8월 11일 낙동강돌출부에 있는 박진(泊津) 나루에서 북괴군 4사단이 영산(靈山) 동쪽으로 공격을 감행하고, 대구 서북방에서는 적 3사단이 낙동강으로 건너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해안에서는 한국군 3사단이 영덕(盈德) 남쪽의 장사동(長沙洞) 해안에서 포위를 당하는 등 전황이 급변함에 따라 킨 특수임무부대의 반격작전을 방어작전으로 전환시켜 거기서 절약된 미 해병5연대(제1여단 소속)를 미8군의 기동예비대로 확보하여 위급한 전선에 투입하는 한편 한국군 등 미 25사단에 배속된 다른 부대들도 배속을 해제시켜 급한 곳으로 전용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한데 그러한 명령을 받은 나는 아침 8시경부터 병력을 집결지로 철수시켜 도보로 중암리(郡北) 기차역으로 행군하여 10시경부터 화차에 승차시키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나는 4분의3 트럭을 이용해서 마산 헌병대로 달려가 헌병대 전화로 부산 제1부두에 위치하고 있는 해군본부로 전화를 걸어 해군참모총장에게 다음과 같은 건의를 해놓고 지체없이 중암리로 돌아갔다.

 

  내가 참모총장에게 했던 말은 실제 건의라기보다는 간절한 통사정이었다. 그 요지는 이러한 것이었다.

 

  즉 매일같이 격전을 치르느라 대원들이 제대로 눈도 붙여보지 못하고 먹지도 못해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잠시라도 휴식을 취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전투를 치를 수가 없는 실정이니 총장께서 미8군에 연락을 취하여 잠시나마 진해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주십사고 간청을 한 것이었다.

 

  진동리지구 전투를 마친 후 나는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이런 전투는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전투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도 그러한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삼복흑서 속에 몇 날, 몇 일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수면도 취하지 못한 채, 더구나 잦은 부대이동 속에 사방을 돌아다니며 특히 야산지에서 전투를 한다는 것은 차라리 죽기보다 더 감당하기 어려운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참담한 몰골로 죽어 있는 전사자들이 오히려 더 편안하고 부럽게 여겨졌던 악몽같은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치 지옥 속의 격전장을 정신없이 누비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중암리 기차역에서 승차했던 그 열차가 마산역에 도착했던 시각은 그날 오후 7시경이었다. 그 열차에는 함께 대구로 이동하게 된 육군의 민기식 대령부대도 승차해 있었다.

 

  그런데 열차가 마산역에 도착했을 때 나는 역구내에서 열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해군헌병대 하사관이 나에게 전한 말을 듣고 이제야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하사관이 해군본부의 지시라고 말하면서 나에게 했던 말은 해병대는 진해로 가게 되었으니 마산역에서 하차하여 마산항 부두에 대기 중인 수송선에 타라는 것이었다.

 

  그날 아침 마산 헌병대로 달려가서 해군본부로 전화를 걸어 손 총장에게 그러한 건의를 하고 중암리로 되돌아 갔던 나는 내심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즉 비록 간절한 심정으로 그런 건의를 하게 되었지만 미8군의 명령을 해군참모총장이 어떻게 변경시킬 수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차라리 기대를 하지 않기로 했던 것인데 뜻밖에도 건의가 받아들여지고 보니 너무나 기뻐서 그러한 조처를 취해준 손원일 총장에 대한 고마움이 눈물겹도록 뭉클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가 있었다.

 

  마산항 부두에는 진해 통제부에서 차출한 금강호(金剛號)를 비롯한 3척의 수송선이 대기 중에 있었다. 3척의 수송선에 병력과 장비를 탑재하여 마산항을 떠난 시각은 그날 8월 13일 10시 40분경이었고, 진해 군항부두에 도착한 시각은 그로부터 1시간 후였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이긴 했지마는 그 군항 부두에는 통제부사령관 김성삼 대령을 위시한 많은 장병들이 출영하여 피로에 지쳐 있는 장병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마치 그리운 고향의 품속으로 돌아온 듯 했던 진해 군항 부두에서 동기(同期)들로부터 그러한 환경과 위로를 받고 보니 나의 몸과 마음 구석구석에 쌓여 있던 피로가 확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날 밤 대원들에게 제공된 숙소는 훗날 함대사령부 건물로 이용된 구 일본군의 방비대(防備隊) 청사였다. 그 청사에서 아무런 부담도 없이 취침을 하게 된 대원들은 얼마나 지쳐 있었던지 군복들을 입은 채 잠자리에 드러눕기가 바쁘게 드렁드렁 코를 골거나 송장처럼 고꾸라졌다. 나 자신도 꿈만 같은 모군부대의 느긋한 품 안에서 전쟁터에서 강요당해 왔던 쓰라린 고통과 결별한 채 때로는 밥보다 더 절실했고, 때로는 차라리 목숨과도 바꾸고 싶기까지 했던 그 한(恨)이 된 잠을 그야말로 코가 비뚤어지도록 실컷 잘 수가 있었다.

 

  내가 7중대를 이끌고 여수항에 도착하여 고길훈 소령과 임무를 교대했던 날짜는 7월 22일이었다. 따라서 여수역 광장에 집결하여 이른 바 김성은 부대로 명명이 된 그 증강된 해병대의 전투주력부대가 남원·운봉·함양·진주 및 진동리 지구 전투를 거쳐 8월 13일 밤 전해로 돌아올 때까지의 그 기간은 일수로 따진다면 불과 24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당시의 내 심정으로는 10년보다 더 긴 세월처럼 느껴졌었다.

 

  나의 심정이 그러했던 까닭은 모군부대와의 연락이 단절되어 있던 우리 해병대가 마치 의붓자식 노릇을 하듯 줄곧 육군이나 미군에 배속되어 때로는 식량이 떨어져 밥을 굶어도 누가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또 탄약이 떨어져도 걱정해 주는 사람이 없는 그러한 곤경 속에서 시종 고전(苦戰)을 치르며 말할 수 있는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날 8월 14일 아침 내가 눈을 뜬 시각은 8시경이었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느끼게 되었던 것은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고요함이었다. 그 사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왔던 전선의 총포성이 전혀 들리지 않는 파도 잔잔한 군항의 아침 분위기가 어떻게나 고요했던지 나는 잠시나마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던 그 전날까지의 일들을 망각 속에 묻어놓고 있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