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6. 진동리 지구 전투
(3) 玄鳳學의 공로
진동리로 돌아온 후 나는 귀한 통역관 한 사람을 맞이하게 되어 말할수 없이 기뻤다. 그렇찮아도 그 전날 부대를 찾아와서 미군들과의 통역을 맡아줘서 영광스럽기 이를 데가 없던 홍종혁씨가 그날 아침 마산에 도착한 후 온다간다는 말도 한 마디 없이 종적을 감추어 버리는 바람에 미군들과의 의사소통에 애로를 겪고 있던 참이었는데, 때마침 현봉학(玄鳳學)이란 유능한 통역관 한 사람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 진해 통제부사령부 방위대에 소속되어 있던 백남표(白南豹) 소령과 함께 진동리에 도착했던 현봉학씨는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의 주선으로 당시 마산에 주둔하고 있던 미 25사단장 킨 소장의 통역관으로 천거되어 현지로 가던 도중 마산에서 만나게 된 백남표 소령에게 납치(현봉학씨의 말)되어 진동리로 오게 된 것이었다. 현봉학씨의 인적사항과 피납경위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47년부터 2년간 리치몬드에 있는 버지니아 주립대학에서 임상병리학을 전공하고 1950년 2월 하순경에 귀국한 뒤 모교인 세브란스 의대에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임상병리실을 개설하여 임상병리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6·25동란을 맞이하게 되었던 현봉학씨(당시 해군 703함 부장으로 있던 현시학 소령의 친형)는 피난지인 대구(大邱)에서 평소 잘 알고 있던 황성수(黃聖秀) 국회 부의장을 만나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이든 보람된 일을 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한 것이 기연(機緣)이 되어 결국 황의장의 청을 받은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의 주선으로 미 25사단장 킨소장의 통역관으로 추천이 되었다. 신 장관의 배려로 해군본부(부산)에서 제공받은 지프차 편으로 마산으로 오게 되었던 그가 25사단 본부로 가지않고 백남표 소령에게 납치(?) 당하게 된 것은 마산 시가지에서 차를 세운 백 소령이 25사단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부대가 있다면서 운전병으로 하여금 현봉학씨가 물씬한 커피냄새를 맡고 차를 세워 달라고 한 25사단본부 앞에 차를 세우게 하지를 않고 곧장 진동리로 달리게 한 때문이었다.
한편 현봉학씨가 현시학 소령의 친형이라는 말에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던 나는 그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즉 미군 군수장교를 구워 삶을 돈을 두둑하게 줄테니 마산에 있는 미 25사단 본부에 가서 BAR와 우리 부대에서 보유하고 있는 각종 무기의 실탄과 수류탄 등을 좀 얻어줄 수 없겠느냐고 했더니 그는, 돈으로 구워 삶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겠지마는 25사단에 배속된 부대이니만큼 직접 찾아가서 딱한 사정 얘기를 한 번 해보겠다면서 쾌히 응락을 했다. BAR는 진주에서 19연대장으로부터 빌린 10정이 있었지만 성능이 워낙 좋은 듯해서 좀 더 갖고 싶었고, 각종 화기의 실탄은 대체적으로 양이 부족했으며, 수류탄은 전혀 보급된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 다음 날 8월 8일 아침 현봉학씨는 부대에서 챙겨준 작은 돈가방 하나와 트럭 두 대를 가지고 내가 동행시킨 장교 1명과 함께 마산으로 떠났는데, 그를 떠나 보낼 때 나의 솔직한 심정은 일이 반드시 성사되리라곤 믿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말대로 돈이나 말로써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다음 날 8월 8일 오후 그가 BAR 15정과 상당량의 실탄상자를 두 대의 트럭에 나누어 싣고 귀대했을 때 나의 기쁨은 그만큼 더 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날 현봉학씨가 나에게 한 말에 따르면 미 25사단 군수참모를 만나 진동리의 KMC에서 무기와 탄약이 모자라 고전을 하고 있으니 좀 지원을 해달라고 했더니 재고품이 적어 도와줄 수가 없다고 하자 그날 저녁 군수참모와 두 사람의 부하장교를 접대부들이 있는 부대 근처의 술집으로 초청하여 기분좋게 대접을 한 다음 같은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KMC도 잘 싸워야 되지 않겠냐며 재차 간청을 한 끝에 그러한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이라고 했다.
현봉학씨가 구해 왔던 무기와 탄약은 8월 10일과 11일의 전투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현봉학씨에 관한 얘기는 해병대의 고성(固城) 함흥(咸興)지구 전투 때 다시 언급이 된다. 고성지구에서 다시금 해병대에 종군한 것이 기연이 되어 미 10군단장 알몬드 중장의 통역관으로 기용이 되었던 그는, 유엔군의 흥남철수작전 때 3천으로 제한되어 있던 민간인 철수 대상인원을 10만으로 늘어나게 하는데 있어 수훈적인 기여를 했던 사람으로 알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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