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6. 진동리 지구 전투
(2) 全 將兵의 일계급 特進
마산 부근에서의 집결지는 성호국민학교였다. 그런데 집결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이러한 희소식에 접했다. 즉 첫번째 소식은 대통령 특명에 의해 8월 6일부로 김성은 부대 전 장병에게 일계급 특진의 영예가 내렸다는 뜻밖의 소식이었는데, 그 특진 소식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명의로 발신된 다음과 같은 축하전문 속에 담겨져 있었다.
김성은 대령부대 귀하
김성은 대령부대의 찬란한 공훈은 높이 찬양되었으며 그 혁혁한 공훈을 충심으로 축하함. 특히 출동부대 전 장병이 일계급씩 특진함에 대하여 축하하며 앞으로의 건투를 기원함.
해군참모총장
그리고 당시 진해 통제부 참모장 김석범 대령은 나에게 대령 계급장 하나를 보내 왔었는데, 그 계급장은 김 선배가 자기 윗 저고리 양쪽 것에 달린 두 개의 계급장 중에서 한 쪽 것을 떼서 보낸 것이라고 하기에 더욱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두번째 소식은 제주도의 해병대사령부에서 보내온 신현준 사령관의 다음과 같은 축하전문과 그 전문 속에 포함된 신병(학도지원병) 1,600명의 입대소식 등이었다.
김성은 대령 귀하
금번 귀관 이하 장병 일동이 진동지구에 참가하여 소수병력과 갖은 악조건을 극복하고 굳은 단결과 일치된 행동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해병대의 전통과 씩씩한 모습을 만 천하에 천양하여 준 공훈에 대하여 충심으로 감사와 경의를 표함. 특히 대통령 각하 특명으로 출동 전 장병의 특진을 무한히 기뻐하며 금후 일층 분발하고 더욱 자중하여 대통령 각하와 국민일반이 크게 기대하는 바에 부합하도록 분투노력 바람. 목하 제주도에서는 신병 1,600명에 대한 입대식을 마치고 전열에 참가하기 위해 장병일동 한 덩어리가 되어 맹훈련을 계속 중에 있음.
해병대 사령관
한편 손원일 해군참모총장과 신현준 사령관으로부터 이와 같은 축하전문을 받게 되었던 나는 두 분의 배려와 격려에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끼면서 다음과 같은 회신을 문서로 발송했다.
해군총참모장
해병대사령관 귀하
당대(當隊) 출동 이후 전 장병 일치단결하여 소명(所命)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음은 위로 총참모장 각하와 사령관 각하의 돈독하신 지도와 간곡한 편달의 덕분으로 생각하고 충심으로 감사와 경의를 표하나이다. 금번 과분한 찬사와 장병전원 각각 일계급씩 특진의 영(榮)을 베풀어 주심에 대하여는 당대의 무쌍의 영광으로 생각하오며 금후 더욱 분발하여 공비(共匪) 완전 섬별에 쇄신분골(碎身粉骨)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김성은 대령
여기에 소개한 축전과 답신의 내용은 진동리지구 전투의 전투상보에서 옮긴 것이다.
이러한 일 외에 또한 진동리로 떠나기 전 해군통제부로부터 수송해온 155명의 보충병을 인수하여 각 중대에 할당했는데, 배치 후 오발사고가 자주 일어나 한동안 골치가 아프게 했지만 그 동안 적지 않은 병력손실이 초래되어 있던 우리 부대로서는 전투력 강화에 큰 도움을 입은 셈이었다.
그리고 8월 3일 부현(夫峴)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이틀 후 성호국민학교에서 본대에 합류했던 염태복, 김익태 상사 일행의 행적과 관련된 얘기도 여기에서 언급해 두고자 한다. 그 얘기를 여기서 언급하려는 이유는 그들의 역할이 곧 전 장병 일계급 특진의 배경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적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즉 그날 오인사격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빽빽한 잡목림 속에서 철수로를 잘못 택해 그 길로 함안으로 가게 되었던 염 상사 일행은 원대에 복귀할 방도를 궁리하며 그날 밤 마산으로 가는 육군 차량에 편승하여 마산으로 갔다가 그 다음 날 8월 5일 아침 신마산과 구마산 어간에 있는 마산 해군 헌병대를 찾아갔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곳에서 염 상사는 뜻밖에도 그와 일본 해군 동기생인 박인준 중위(당시 통제부사령관 부관)를 만나게 되었고, 또 박 중위는 7월 31일 진동리로 출동한 우리 부대의 소식을 알지 못해 걱정을 하고 있는 통제부사령관(김성삼 대령)에게 염 상사 일행을 데리고 간 즉 통제부사령관은 즉시 그들을 상황실로 안내하여 우리 부대의 상황을 설명하도록 했고, 브리핑을 맡게 된 염 상사는 면계(面界)나 군계 표시도 없는 100만분의 1 지도를 짚어가며 자신이 겪은 남원, 운봉, 함양 진주지구 전투를 간략하게 설명한데 이어 특히 8월 2일 새벽 고사리 지구에서 거둔 7중대의 혁혁한 전과와 신나는 무용담을 늘어놓고는 현재 우리 김성은부대는 마산과 함안 어간의 산악지대에서 사력을 다해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여 브리핑을 경청하고 있던 장교들을 긴장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그런 다음 염 상사 일행은 다시 마산 헌병대로 돌아갔다가 때마침 우리 부대가 성호국민학교에 와있다는 소식을 듣고 원대에 복귀하게 된 것이 었다.
따라서 그로부터 불과 이틀 후 8월 6일에 내렸던 그 특진명령은 물론 통제부사령관의 보고에 접한 손원일 참모총장의 전격적인 공적 내신과 적극적인 건의에 의한 것이었겠지만, 그 동기를 부여했던 장본인은 역시 그러한 우여곡절 끝에 그러한 브리핑을 했던 그 염태복 상사(예비역 준장)가 아니었던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부대가 진동리를 향해 출발한 시각은 8월 6일 오후 3시경이었다. 그런데 오후 6시경 진동리 동북방에 있는 254고지 부근을 통과할 때 진동리를 감제(瞰制)하는 고지 상공을 선회하고 있던 미 해병대의 콜세아 전폭기들이 급강하를 하며 네이팜탄과 로켓포탄을 퍼붓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는데, 진동리의 미군 포대와 야전병원 및 주요부대의 지휘소와 병력집결지 등을 위협하고 있던 254고지의 적을 섬멸하기 위한 미군들의 공격은 3일간 계속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부대가 진동리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7시경이었다. 도착 즉시 나는 방어를 위한 부대배치를 완료한 뒤 나는 이런 광경을 목격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즉 진동국민학교 뒷산 기슭에서 갖 배치된 듯한 10여명의 미국 해병들이 적 박격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하자 보통 군인들 같았으면 혼비백산 달아나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배낭 뒷쪽에 꽃혀 있는 야전삽을 꺼내더니 각자의 입사호(立射壕)를 파기 시작했고, 또 지프차 곁에 앉아 있던 운전병은 입사호 대신 그 차를 은폐시킬 구덩이를 파고 있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군인들이 아닐 수가 없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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