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7. 統營上陸作戰
(7) 원문고개 공방전
적이 예비대를 투입하여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던 나는 급히 귀함하려는 이성호 함장에게 원문고개에 대한 사격지원에 만전을 기해 줄 것을 당부한 다음 SCR-300으로 원문고개의 2중대장과 7중대장을 차례로 호출하여 적의 반격에 철저히 대비토록 지시했다. 그때 7중대장의 보고에 따르면 7중대가 원문고개에 도착했던 시각은 오후 1시경이라 했고, 주먹밥 한 개씩을 먹은 다음 곧 원문고개의 좌일선쪽에 병력을 배치시켰다고 했다.
여러 문의 야포가 동원된 것으로 추측된 포격은 차츰 치열도가 저하되긴 했으나 땅거미가 질 무렵까지 계속되더니 어둠이 짙어지기 시작하자 마침내 약 1,000명으로 추산된 적의 공격부대가 공격을 감행해 오는 것이 었다.
적이 공격해 오자 나는 적을 진지 전방 약 300미터 지점까지 접근시켜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요격을 하도록 했고, 또 703함에 사격지원을 요청하여 강력히 저지했으나 야음을 이용해서 일부 적이 진전으로 쇄도해옴으로써 피아간에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적은 결국 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한 채 10시 50분경 일단 퇴각을 하고 말았다.
적이 재차 공격을 감행했던 시각은 20일 새벽 2시 40분경이었다. 예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지칠대로 지친 해병들이 곤히 잠들어있던 시각에 감행된 적의 재공격은 아군 진지가 위급한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원문고개 양쪽 해안선을 따라 침투할 약 80명의 적 결사대가 f중대와 7중대의 배후를 찔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전후 양면의 적과 동시에 싸워야 했던 2중대와 7중대 장병들은 그만큼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지를 사수하라고 외쳐대는 호랑이 같은 분대장들의 불호령에 고무되어 결사적인 사투를 벌였다.
진지 전방의 적은 계속 화력으로 저지하고 배후의 적은 백병전으로 처치했다. 대검과 총대를 주무기로 하고 박치기와 씨름과 이빨 등을 보조무기로 한 처절한 백병전에서 해병들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맞닥뜨린 상대가 적군인지 아군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어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머리를 만져 보라!" 고 소리친 누군가의 말이 전파되어 일단 상대의 머리부터 만져 보느라 더욱 경황들이 없었다.
피아군의 백병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2중대의 진지 일각이 적에게 돌파를 당해 한동안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되었으나 다행히도 돌파구를 봉쇄함으로써 결정적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원문고재를 사이에 둔 피아군의 피비린 공방전이 끝난 시각은 날이 뿌옇게 샐 무렵이었다.
그때까지 살아남아 있던 적의 특공대 대원들은 전날 밤 제2선에 배치해 둔 일부 증원중대 병력과 3중대 병력에 의해 역포위(逆包圍)를 당한 끝에 대부분이 사살되거나 생포를 당했다.
그날 아침 나는, 2중대장이 보내 준 소련제 지프차를 타고 원문고개를 시찰했다. 운전경험이 있는 대원을 가까스로 물색하여 보내 준 지프차를 타보게 된 나의 기분은 그야말로 째질 것만 같았다. 그때까지 지프차를 가져 본 적도 없었고, 또 제주도를 떠난 후로는 단 한 번도 타보지 못했던 내가 더구나 노획한 소련제 지프차를 타고 간밤에 적을 격퇴시킨 진지를 시찰하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마치 개선장군이 된 듯한 기분이 아닐 수 없었다.
밤이 새도록 혈전이 벌어졌던 현장에는 참담한 몰골의 시체들이 무수히 뒹굴고 있었다. 시체들 중에는 단검에 찔려 죽어 있거나 개머리판에 골통을 맞아 난자를 당했거나 귓부리나 코몽생이가 물려 뜯겨 있는 시체들도 있었는데, 그러한 시체들은 모두가 진내의 백병전에서 피살된 시체들이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 7중대 1소대 진지에서는 착검된 Ml소총의 총검과 개머리판으로 다섯 명의 적을 때려 누이고 자신도 적병들의 총검에 목덜미를 찔려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고종석(高鍾碩) 해병의 시체가 발견되어 전우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고인이 소지하고 있던 M1소총의 총대에는 적병들의 총검을 치고 받은 흔적이 역연했다. 그리고 7중대장의 간청에 따라 2계급 특진을 상신했던 고종석 해병에 대해서는 그 후 7중대 장병들이 고인의 뛰어난 용맹과 감투정신을 뭇 해병들의 거울로 삼게 하려는 뜻에서 군신(軍神)으로 받들겠다는 뜻을 비친 적도 있었으나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또한 그날 아침 원문고개의 해병진지에는 수십 명의 장문리(용남면)주민들이 몰려와서 무수한 시체가 뒹굴고 있는 끔찍한 현장을 목격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게슴츠레한 눈을 보니 그들도 뜬눈으로 날을 밝힌 모양이었는데, 간밤의 전투에서 해병들이 패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워 이긴 것을 확인하게 되었던 그들은 "아이고 해병대 아저씨들, 우짜마 그렇게도 용감하게 잘 싸우십니껴···우리 통영 사람들 해병대만 믿고 있겠심니더" 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고, 정오경이 되자 닭이며 소와 돼지 등을 잡아 해병들에게 제공하는 등 온 마을 사람들이 승전을 축하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10일 오후 1시경 중대장들에게 진지를 보강하라는 지시를 하고 원문고재를 떠나왔던 나는 지프차를 탈 때 이러한 일을 겪었다. 즉 차에 올라 탈 때 등 뒷쪽에서 "부대장님 부대본부까지 좀 태워 주십시요." 하며 뛰어 오는 대원이 있기에 잠시 승차한 채 그 대원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제는 덮개가 없는 지프차 뒷좌석에 뛰어 오른 대원의 한 쪽 손아귀에 쥐어져 있는 수류탄의 손잡이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나는 "야 이놈아 수류탄 터지겠어! 빨리 집어 던져!" 하고 소리치며 후다닥 차에서 뛰어 내려 땅바닥에 엎드렸다. 그러자 소스라치게 놀란 대원은 쥐고 있던 수류탄을 차 뒷편으로 냅다 집어 던지고선 앞뒷 쪽에 타고 있던 운전병과 전령과 함께 정신없이 뛰어 내려 엎드림으로써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때 그 대원이 움켜쥐고 있던 수류탄은 이미 제거되고 없는 안전핀 대신 그가 꽉 잡고 있던 수류탄의 손잡이가 안전핀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류탄에서 연기가 났던 것은 그 대원이 지프차 뒷좌석으로 뛰어오를 때 자신도 모르게 밀착이 돼 있어야 할 그 손잡이와 수류탄의 접촉 부위에 순간적인 부주의로 인한 갭이 생겨 격발(擊發)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는데, 공무로 부대본부에 가려고 했던 그 대원이 전투중이 아닌데도 수류탄을 가지고 그런 위험한 짓을 했던 것은 그 대원이 수류탄의 안전장치를 시험해 보기 위해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다 꽃았다 하다가 때놓은 안전핀을 미처 꽃기도 전에 차를 타기 위해 손잡이만 움켜 잡은 채 허둥지둥 뛰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날 낮 지취소로 돌아온 나는 통영읍의 치안과 행정업무를 한시 바삐 경찰서와 읍사무소로 이관시켜야 되했다는 생각에서 경찰서장과 읍장이 피난을 가 있다는 한산도(閑山島)로 사람을 보내어 나의 그러한 뜻을 서장과 읍장에게 전하도록 했다. 그때 내가 특별히 신경을 쓰고 있었던 일은 민간인들이 신고한 부역자(附逆者)들을 처리하는 문제였다. 북괴군에게 부역을 한 자들을 부대에서 처리하게 될 경우 사실 여부의 경중(輕重)을 가리기도 어려운 일이었고, 또 후일 주둔군 부대에서 무고(無辜)한 양민을 죽였다는 원성을 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으므로 나로서는 그 일을 경찰로 하여금 맡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읍장이 돌아오게 되면 지체없이 행정을 복구해서 위축된 읍민들의 생활의욕을 고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농협창고 속에 약 1,000가마의 쌀이 보관되어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나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그 쌀을 후방지역으로 옮겨 두는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해군본부에 타전하여 그러한 뜻을 전했더니 그 쌀을 부산으로 운송하라는 지시가 내려 총 1,100가마 가운데 800가마를 부산으로 실어 보내고 나머지 300가마는 군량미로 확보해 두었다.
한편 그날 오후 통영 부두 일각에는 해병들에 의해 붙들려 온 100여명의 포로병들이 해군 정보대 요원들에게 인계되어 그들을 운송해 갈 배를 기다리고 있었고, 또한 근처 해변에는 조그만 목선에 응급처치용 의약품과 기자재 등을 싣고 후송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구호반원들이 있었다. 그 당시 야전병원선에서 활약했던 의무 요원들은 오원선 대위와 이호선 중위 등 2명의 군의관과 이광희, 김수만 소위 등 2명의 간호장교들이었다.
원문고개에 대한 적의 야간공격은 23일까지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밤 감행되었으나 아군에 의해 번번히 격퇴당함으로써 주력이 와해되어 그 뒤 9월 11일경까지 일부 병력에 의한 간헐적인 공격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적 패잔병들 가운데 일부 병력은 원문고개 서북방 2킬로 떨어진 제석봉(帝釋峰)과 죽림리(竹林里) 및 원문고개 서방의 수월리(水月里)와 북쪽의 봉화산(△325)과 매봉산(△300) 등지로 분산되어 준동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었다.
한편 21일 아침 나는 이런 일을 겪었다. 즉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7중대장 안창관 대위가 2중대 소대장 조광호 중위를 나에게로 끌고 와서 하는 말이 "부대장님 이 새끼가 중대장의 뺨을 갈겼시요. 이따위 놈의 새끼 당장에 즉결처분 해야갓시요." 하며 격분을 하는 것이었다.
중대장의 뺨을 갈겼다는 말에 무슨 일이 있었나 해서 자초지종 영문을 알아보았더니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즉 조광호 중위가 직속상관인 2중대장의 뺨을 갈긴 것은 중대장으로부터 심한 꾸중을 듣고 보니 자신도 모르게 울컥 치밀어 오른 감정이 폭발한 때문이라 했고, 2중대장 김광식 대위가 조광호 소대장에게 "해병대가 철수를 하다니··· " 하며 모욕적인 언사를 구사하며 힐책을 했던 것은 그 전날 일몰시에 전방 능선에 배치시켜 놓았던 소대가 중대장의 명령을 무시하고 적이 공격을 개시하자 제2선으로 철수한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7중대장 안창관 대위가 조광호 중위를 포박하여 나에게로 끌고 왔던 것은 군기가 지엄해야 할 진중에서 직속상관에게 폭행을 가한 자를 어찌 그대로 놔 둘 수 있겠냐며 격분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건의 전말을 알아본 나는 조광호 중위를 즉결처분하지 않고 해군본부로 압송하여 군법회의에 회부하도록 조처를 취했다. 내가 그러한 조치를 취했던 것은 가족적인 단결심이 강한 우리 해병대에서만은 비록 전쟁터라 할지라도 부대장이 부하장병을 즉결처분하는 그와 같은 선례를 남기고 싶지가 않았고, 또 조부의 대로부터 기독교를 신앙하고 있던 나는 비록 전쟁터에서 일어난 사건이긴 했지마는 하늘이 준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매우 중시하고 있는 터였으므로 즉결처분과 같은 극형에만은 처하고 싶지가 않았다. 결국 그날 해군본부로 압송이 되었던 그 조광호 중위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벌을 받은 다음 9·18 직후 원소속이 아닌 다른 부대에 배치되어 근무를 했고, 그 후 준장의 계급까지 승진을 했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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