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7. 統營上陸作戰
(9) 703함의 命令違反事件
8월 22일 통영 앞바다에는 PC-703함과 임무를 교대할 PC-704함이 도착했다. 704함은 그해 봄 롱비치 미 해군기지에서 인수하여 귀국 도중 하와이의 진주만에 기착했을 때 6·25동란이 발발했다는 급보를 전해 듣고 급거 귀국하여 진해에서 명령을 대기하고 있던 중 703함과의 교대명령을 받고 출동한 것이었는데, 함장은 최효용(崔孝鏞) 중령이었고, 부장은 공정식(孔正植) 소령, 포술장은 이맹기(李孟基) 소령이었다.
한데 704함이 도착했던 그날 밤 9시경 적이 원문고개에 대한 야간공격을 감행했으나 그 두 척의 포함이 함께 화력지원을 해 줌으로써 쉬이 격퇴시킬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23일 아침 나는, 임무를 교대하고 진동만(鎭東灣)으로 떠나는 PC-703함을 타고 진해 덕산비행장 옆의 행암만으로 향했다.
덕산비행장에 주둔하고 있는 공군부대의 지원을 얻어 집요하게 원문고개의 아군진지를 위협하는 적의 포진지와 병력 집결지 등을 탐색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러한 제의를 했을 때 이성호 함장은 704함과 임무를 교대하는 즉시 진동만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내렸으므로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다고 했으나 모든 책임을 내가 다 질테니 지상군 부대를 위한 마지막 작전지원이라 생각하고 T-6기 한 대씩을 타고 정찰비행을 한 번 해 보자고 했더니 그제서야 마지못해 응락을 했다.
그리하여 급히 진해로 가게 되었던 이성호 함장과 나는 함정을 행암만에 대기시켜 놓고 그곳 공군기지인 덕산비행장으로 가서 협조를 구한 끝에 2대의 T-6기에 한 사람씩 타고 약 10분후 통영 상공에 이르러 적지에 대한 공중정찰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비행기가 유지하고 있던 고도(高度) 약 1,000미터 상공에서 지상을 내려다 보니 시야에 비치는 것은 도로와 수목과 촌락, 야산, 전답 등일 뿐 내가 눈여겨 보고자 했던 적의 포진지나 병력 집결지 등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탄 그 T-6기의 조종사 강호륜(姜虎倫) 대위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저공비행을 한 번 해 보라고 강요했더니 기체가 급강하할 때 어떻게나 속이 메스껍고 정신이 아찔한지 여러 차례 저공비행을 시도해 보다가 그 이상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적의 포진지고 뭐고 다 포기를 하고 그대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때 그 조종사는 새파랗게 질려있는 내 얼굴을 보고 빙그레 웃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먼 훗날 소장의 계급으로 예편했던 강호륜씨는 이미 고인이 되고 말았다.
한편 내가 탄 T-6기가 기수를 돌리자 이성호 함장이 탄 비행기도 그 뒤를 따랐다. 한데 두 대의 비행기가 덕산비행장에 도착한 직후 나는 통제부사령부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아 보곤 심상찮은 일이 터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통제부 작전참모 김충남 중령이었다. 그가 나에게 했던 말은 해군본부에서 이성호 함장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여 포살을 하겠다며 격분을 하고 있다는 말과 말썽을 빚게 된 이유가 진동만으로 가 있어야 할 703함이 명령을 어긴 것이 발단이 되어 해군본부의 입장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해군본부의 입장이 난처해졌던 까닭은 그날 행방이 묘연해진 703함의 위치를 확인 중에 있던 연합군 봉쇄함대 사령부의 물음에 대해 해군본부에서는 확인도 해 보지 않고 진동만에 가 있다고만 답변했다가 결국은 망신을 당한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말을 마치면서 김충남 중령은 통제부사령장관의 명령이라고 말하면서 나더러 이성호 함장을 데리고 즉시 장관실로 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성호 함장에게 그런 뜻을 전한 다음 통제부에서 보낸 지프차를 타고 장관실로 갔더니 곧 해군본부와의 연락이 취해져 해군참모총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이성호 함장은 호된 질책을 받았으나 내가 나서서 부대의 공격목표를 찾아내기 위해 한 것이니 나를 봐서 너그럽게 통촉해 달라고 간청을 한 끝에 가까스로 용서를 받을 수가 있었다.
한산도로 피난을 가 있던 통영경찰서장과 통영읍장이 직원들을 거느리고 통영에 도착했던 날짜는 8월 23일 경이었다. 서장이 돌아오자 나는 그동안 주둔군 부대에서 관장하고 있던 통영읍에 대한 치안업무를 경찰서로 이관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따라서 그날부터 해병들이 부역자나 용공분자들을 잡게 되면 그들을 경찰서로 연행하여 처리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통영읍장과 직원들이 돌아와서 읍의 행정업무를 관장하게 되자 나는 읍장에게 장병들의 주부식을 조달하는 자금을 내놓으면서 읍사무소에서 그 일을 맡아 줄 것을 요청했더니 읍장이 쾌히 수락해 줌으로써 해병들이 통영 앞바다에서 잡은 영양가도 높고 맛도 좋은 해산물을 포식하며 사기를 드높일 수가 있었다. 그 당시 통영읍장으로 있던 김채호(金菜鎬)씨(당시 57세)는 그 당시 호놀룰루 총영사로 있던 김용식(金容植)씨(후일 외무장관 역임)의 부친이었다.
한편 아군의 기습적인 통영상륙작전과 원문고개의 방어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자 8월 21일 신성모 국방장관은 부대표창에 이어 축전을 보내왔고, 22일에는 제주도의 신현준 사령관이 발신한 축전이, 그리고 23일 오후 20시경에는 쾌속정을 타고 부산항 제1부두에서 통영부두로 직행한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이 부둣가의 지휘소를 방문하여 극진한 찬사로 승전을 축하하고 장병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한데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7중대장 안창관 대위가 나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그 전날 해군 증원중대의 신임 중대장으로 부임한 염봉생(廉鳳生) 소령이 한밤중에 7중대 진지에 나타나 마치 넋나간 사람처럼 적진을 향해 이런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즉 두 손을 입가에 갖다 모으고선 "야 이놈들아 너희들 누구를 위해 싸우러 왔느냐" 하며 소리쳤다고 하면서 "저런 사람이 억케 장교가 되었디요?" 하며 비웃고 있었다.
8월 18일 탄약과 1개 중대의 증원병력을 인솔해 왔던 김석근 중위(통제부방위대 1대대 1중대 선임장교)는 8월 21일 조정우(趙丁佑) 소령(통제부방위대 1대대 1중대장)과 교체되고, 조정우 소령은 부임한지 이틀만에 염봉생 소령(당시 통제부 소속)과 교체되고 말았는데, 그 염봉생 소령은 그 후 해병대로 전입, 2대대장으로 임명되어 북진(北進) 작전에 참가했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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