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7. 統營上陸作戰 (10) 最高價의 煙幕彈

머린코341(mc341) 2014. 7. 27. 09:13

국방의 멍에 - 7. 統營上陸作戰

 

(10) 最高價의 煙幕彈

 

   원문고개에서 연일 야간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나는, 중대장들의 요청에 따라 60밀리와 81밀리 박격포탄을 특별히 공급해 줄 것을 해군본부에 요청한 끝에 60밀리와 81밀리 포탄 각 300발씩을 공급받게 되었으나 703함으로부터 전갈을 받고 포탄상자들을 운반해 와서 뚜껑을 열어본즉 포탄들이 폭발성이 강한 고폭탄이 아니라 공격목표 지점을 알릴 때 사용하는 연막탄이란 사실을 알고 매우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한 연막탄은 자칫 바람이 아군진지 방향으로 불게 될 경우 시계(視界)를 차장(遮障)할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해군본부에 연락을 취하여 고폭탄과 바꿔 달라고 말하면서 연막탄을 수령해서 보내게 된 경위를 알아보게 했더니 부산 수영(水營) 비행장 근처에 있는 미군 탄약보급창으로 직접 탄약을 수령하러 갔던 작전국장 이용운(李龍雲) 대령이 가장 값비싼 것이 가장 우수한 성능을 지닌 포탄인 줄 알고 탄종을 묻는 미군 보급관의 물음에 "모스트 익스팬시브 쉘(최고가의 포탄)" 이라 했기 때문에 연막탄을 수령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러한 말을 전해들은 나는 내심 고소를 금할 길이 없었다.

 

  원문고개에 대한 적의 야간공격이 뜸해진 8월 하순경부터 9월 초순경에 이르는 동안 나는 기습공격을 자원하고 나선 청년방위대 대원들(약30명)과 일부 해군방위대(증원중대) 병력을 투입하여 앞에서 언급한 원문고개 북방과 서측방의 촌락과 고지에서 준동하고 있는 적 패잔병 소탕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는데, 그때마다 704함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그리고 어떤 때는 나 자신이 직접 704함에 승선하여 기습대의 작전을 지원한 적도 있었는데, 어느 날 밤 나는 704함 부장 공정식 소령이 나의 만류를 무릅쓰고 1개 분대의 기습대를 진두지휘하여 적정도 알지 못하는 섬에 과감하게 상륙하여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해군장교들 중에 저렇게 용감한 장교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후일(1·4후퇴 직후) 우연히 진해 통제부에서 나와 마주치게 되었던 그는 해병대로오지 않겠냐는 나의 권유를 즉석에서 받아들여 제1대대장으로 임명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고, 후일 해병대사령관을 역임했다.

 

  원문고개의 공방전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9월 초에서 9월 10일까지 원문고개의 아군진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병력의 변동이 초래되었다. 즉 9월 2일 해군본부에서는 8월 18일 오후 통영에 도착한 이래 시가지 소탕전과 원문고개 방어전에 참가했던 진해 통제부방위대 1중대(증원중대)와 임무를 교대시킬 제2중대(방위대)를 김동준(金東俊) 소령의 지휘하에 보내 왔으나 9월 5일 해군본부에서는 그 2중대를 다시 진해로 복귀시킴과 등시에 통영에 머물고 있던 통제부 방위대의 백남포 소령으로 하여금 진동리 전투 때 지원해 준 155명이 지원병력도 함께 인솔하여 진해로 복귀하도록 조처했다.

 

  그리고 9월 10일에는 신현준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부산항 부두로부터 보내 온 2개 중대의 신병중대를 받아들이는 대신 나의 지휘하에 있는 2중대와 3중대를 부산으로 보냈다.

 

  당시 부산항 부두에는 제주도에서 편성한 3개 대대의 해병대 병력이 극비에 부쳐진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집결해 있었는데, 약 3,000명의 제주출신 학도병과 모슬포부대 병력을 혼합해서 편성한 3개 대대가운데 1대대가 학도병이 가장 많은 대대였으므로 그와 같은 방법으로 1대대의 전투력을 보강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신편된 1개 연대 규모의 전투병력이 어느 전선으로 가는지 전혀 예측을 할 수가 없었다. 안강(安康) 지구로 간다는 소문이 있긴 했지마는 그것은 뜬소문일 뿐 그 당시의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16일 아침 나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미 해병 제1사단과 미 육군 제7사단을 주축으로 하는 미 제10군단이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작전지휘 하에 9월 15일 아침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수세에 놓여 있는 아군의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한 반격의 기점(起點)을 설정하게 되었고, 목하 상륙선봉군은 서울로 진격 중이며,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는 한국 해병대의 1개 연대병력이 상륙선봉군부대인 미 해병1사단에 배속되어 미 해병5연대와 함께 레드비치(적색해안)에 상륙을 했다는 고무적인 소식을 전해 듣고 얼마나 감격을 했던지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감격과 흥분 속에 '과연 유엔군은 강하구나!''이제 전쟁에 이기게 되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나는 문득 이미 확보되어 있는 원문고개는 해군방위대에 인계하고 한시 바삐 인천으로 가서 서울로 진격을 개시하고 있는 해병대에 합류하여 수도 탈환작전에 참가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져 지체없이 해군본부에 그 문제와 관련된 건의전문을 타전했더니 해군본부에서도 공감을 했던지 '그렇게 해보겠다'는 1차 회신이 온 뒤 '곧 가게 되니 준비를 하라'는 전문이 오게 됨으로써 나와 나의 부대 장병들의 사기를 고무해 주었다.

 

  원문고개에 배치되어 있던 나의 부대가 부대이동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던 날은 9월 21일이었다. 그날 나는 해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원문고개의 방어진지를 김충남 중령이 지휘하는 진해통제부 방위대 제1대대에 인계하고 새로운 작명을 수행하기 위해 통영국민학교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나에게 부여된 새로운 임무는 휘하 모든 병력을 인솔하여 인천(仁川)으로 이동하는 일이었다. 그 당시 해병대는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후 수도탈환을 위해 계속 서울로 진격 중에 있었다.

 

  통영국민학교에 집결하여 휴식과 부대정비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해병대에 지원 입대하기를 원하는 상당수의 통영출신 학생들과 청년들을 현지입대시켜 병력을 증강시켰다. 그때 입대했던 학도병들 중에는 후일 해병대사령관을 역임한 김정호(金正鎬)씨와 정동식(鄭東植), 양봉덕(梁鳳德), 정덕회(鄭德恢)씨 등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부대가 통영을 떠나기 하루 전날 오후 3시경, 통영부두에는 국회의장을 지낸 곽상훈(郭尙勳), 임흥순(任興淳), 이종수씨 등 6명의 국회의원과 그들의 수행비서 등 15명이 도착했는데, 해군본부에서 제공한 피켓보우트를 타고 왔던 정치인 일행은 그날 통영에서 일박하고 그 다음날 해병들과 함께 상륙수송함(LST) 단양호(丹陽號)에 승선하여 인천으로 갈 예정이었다.

 

  한편 통영국민학교에 머물고 있는 동안 나는 해병들이 8월 17일 기습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한 이래 36일간을 주둔하며 방어전을 수행했던 그 전승지(戰勝地)를 아무런 고별행사도 없이 떠나기가 아쉬워 통영읍장과 경찰서장을 비롯한 여러 기관장들과 상의를 한 끝에 당일 아침 해병들이 통영국민학교에서 통영부두로 향해 행진해 갈 때 경찰서 앞에 사열대를 마련하여 그 앞을 분열행진을 하며 고별의 예를 갖추도록 하는 행사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23일 아침 10시경 부부대장 김병호 소령의 지휘 하에 지독한 화약 냄새가 그대로 풍기고 있는 기관총과 박격포의 몸통과 포신·포판 및 소총 등을 어깨에 둘러메거나 손에 들고 통영읍의 여러 기관장과 인천으로 함께 떠날 국회의원들이 나와 함께 서 있는 사열대 앞을 보무도 당당하게 분열행진을 하며 '우로 봐'의 경례를 했고, 경례를 받은 단상의 인사들과 사열대 양 옆에 운집해 있던 통영 읍민들은 열띤 박수로써 답례를 해 주었다. 그때 읍민들 중의 누군가가 "해병대가 서울을 탈환하러 간단다" 고 소리치며 "해병대 만세" 를 선창하자 많은 사람들이 '해병대 만세'를 외쳐대며 해병들을 격려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오전 11시 30분경 해병들과 국회의원들이 승선한 LST단양호가 통영부두를 떠날 때 나는 중기관총 1문을 갑판 위에 거치하여 충렬사 뒷편의 178고지 상공을 향해 100여발의 총탄을 발사하게 했다.

 

  해병들이 빛나는 승전을 거둔 그 격전지의 산하에 대한 고별과 통영지구전투에서 산화한 전우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날 전승지의 산하에 울려 퍼졌던 총성은, 그날 통영읍민들이 부두까지 따라 나와 보내 준 열띤 박수소리와 만세소리 등과 함께 지금도 내 부실한 청각속에 아련히 남아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나로서는 그런 생각을 해 보지 못했지만 그 후 통영상륙작전의 의의에 대해 이런 평가를 해 본 적이 있었다. 즉 유엔군과 국군의 수세적인 지연작전기(遲延作戰期)에 수행된 아군의 첫 반격작전은 1950년 8월 7일부터 12일까지 전개된 킨 특수임무부대의 진주(晋州) 탈환을 위한 반격작전이었고, 8월 17일 아침 영산(靈山)지구에서는 미 24사단 19연대에 긴급 배속된 미 2사단 9연대와 미 해병 제5연대가 북괴군 4사단의 낙동강 돌출부(突出部) 점령으로 인해 조성된 창념지구(昌寧地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결사적인 반격작전을 감행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작전들은 배속부대들이 말해주듯 미 8군의 작전지휘 하에 수행된 대대적인 반격작전이었는데 반해 8월 17일 오후 아무런 사전준비도 없이 결행했던 통영상륙작전은 우리 해군과 해병대가 미 8군이나 타군부대의 직접적인 지원없이 수행한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이었고, 또 성공적으로 수행된 작전이었다는 점에 있어 전사상(戰史上)에 큰 의의를 남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