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10. 北 進 (1) 원산으로의 移動

머린코341(mc341) 2014. 8. 3. 18:25

국방의 멍에 - 10. 北 進

 

(1) 원산으로의 移動

 

  한·미 해병대가 새로운 작명을 수행하기 위해 인천항을 출항했던 시기는 10월 중순경이었다. 즉 미 해병1사단은 10월 12일 원산으로 떠나고, 13일에는 우리 해병대의 3대대와 5대대가 빅토리호에 승선하여 역시 원산으로 떠났다. 그리고 사령부 제대(梯隊)만은 선편으로 가지 않고 일부는 비행기편으로 가고 일부는 육로로 갔다.

 

  즉 사령관과 참모장을 비롯한 인사, 정보, 작전 등의 참모부서 장병들은 비행기로 가고, 군수, 보급, 의무 등 후방제대에'속하는 부서는 군수참모 김동하 소령의 지휘하에 육로로 가게 되었다. 후방제대의 인원과 물자를 운반하는데 동원이 되었던 차량들은 일부는 미 해병대에서 지원한 것이었지만 대부분은 경인지구작전 때 북괴군으로부터 노획한 소련제 가스차와 찌즈차 등이었다.

 

  인천에서 출항한 부대 가운데 고길훈 소령이 지휘한 1대대는 동해안의 산악지대를 따라 퇴각 중인 적을 포착 섬멸하기 위해 18일 묵호(墨湖)로 향하고, 같은 날 김종기 소령이 지휘한 제2대대가 목포(木浦)로 향했다. 제2대대가 목포로 가게 되었던 것은 퇴로를 차단당한 호남지구의 적 패잔병 소탕과 해군 목포경비부의 재건을 지원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해병대가 인천에서 출항할 때 김문상(金汶常) 중위가 지휘하는 5대대 25중대를 육군 수도(首都)경비대에 배속시키는 한편, 김두찬 중령을 서울 잔류 부대장으로 임명하여 헌병대의 일부 병력과 보충대와 휼병부등의 잔류병력과 서대문에 있는 백인제(白仁濟)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있는 환자들을 돌보게 했는데, 수도 탈환작전 때 해병대의 야전병원으로 이용이 되었던 그 백(白仁濟)병원에는 그 당시 상당수의 환자들이 입원해 있었다.

 

  3대대와 5대대가 명사십리(明沙十里)에 상륙했던 날짜는 10월 27일이었다. 아군이 원산만에 직접 상륙을 하지 못했던 것은 원산만 일대에 부설해 놓은 무수한 적의 기뢰 때문이었다. 그리고 3대대와 5대대가 원산에 상륙했을 때 원산여고(女高)에는 그 전날 미 해병대가 상륙한 뒤 원산에서 도착했던 제1대대가 숙영을 하고 있었다. 그 1대대는 23일 묵호에 상륙을 했으나 아무런 적정이 없어 원산으로 오게 된 것이있다.

 

  그리고 해병대가 원산에 집결했을 때 원산지구에는 한국군 제1군단이 진주하여 그 휘하 전투부대들이 함흥을 거쳐 동해안으로 북상 중에 있있고, 26일 새벽 명사십리에 상륙했던 미 해병1사단은 장진호(長津湖) 방면으로 출동하기 위해 대기중에 있었다. 또한 원산에는 남상휘(南相徽) 중령이 지휘하는 해군 전진기지사령부도 설치되어 있었다.

 

  10월 말로 접어들고 있던 그 무렵 아군(유엔군과 국군)은 10월 19일에는 평양(平壤)에 입성을 했고, 22일에는 신안주(新安州), 26일에는 압록강변의 소도시 초산(楚山), 30일에는 장백(長白)과 접경한 혜산진(惠山鎭)을 점령하는 등 국토통일을 목전에 두고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러한 시기에 원산에 집결하게 된 해병대는 미 10군단의 명령에 따라 제3대대를 미 해병 7연대에 배속시켜 덕원(德源)으로 출동시켰으나, 그 3대대는 그곳에서 다시 함흥(咸興)으로 전진(轉進)했다가 명령에 따라 29일 원산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10월 29일 미 해병 5연대에 배속되어 어운리(於雲里)로 출동했던 5대대도 10월 31일 미 해병 5연대의 배속에서 해제되어 원산으로 복귀했다. 그 당시 아군에 의해 점령되고 있던 원산지구의 물가는 너무나 쌌더.

 

  안변(安邊)사과 맛이 좋다는 말이 있어 전령에게 약간의 돈(지폐)을 주며 사과 몇 재를 사오라고 했더니 약 두 시간이 지나서야 나타난 그 전령의 말에 따르면 불과 몇 푼을 주고 산 사과의 양이 너무 많아 사람을 시켜 지게로 운반해 오느라 진땀을 뺐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기로는 그 당시 원산 시내에서 통용되고 있던 우리화폐와 북한 화폐의 환율은 1(원):10(원)으로 조정이 돼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북한 화폐의 가치가 그만큼 절하(切下)되고 보니 그 당시 내가 받고 있던 월급의 한 배 반 정도의 돈이면 약 30~40톤급 어선 한척을 능히 살 수 있을만 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