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12. 재출동(再出動) (8) 정선지구 전투(旌善地區 戰鬪)

머린코341(mc341) 2014. 8. 7. 09:18

국방의 멍에 - 12. 재출동(再出動)

 

(8) 정선지구 전투(旌善地區 戰鬪)

 

  해병대가 정선에 집결완료한 시각은 3월 3일 오후 3시경이었다. 그 무렵 아군의 반격으로 후퇴를 거듭했던 북괴군 2사단과 15사단의 주력은 또다시 아군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하진부리 일대에 집결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적을 격퇴시키기 위해 3군단에서는 동 군단에 배속된 수도사단으로 하여금 하진부리의 동측을 점령하게 하는 한편 9사단을 예비사단으로 확보하고 있었다. 당시 9사단의 본부는 송계리(松溪里)에 위치하고 있었고, 30연대는 정선에 28연대는 여량리 부근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속에서 해병 제1연대는 거문리(巨文里)까지 진출해 있던 7사단과 수도사단의 간격을 보강하라는 군단의 명령을 받게 되었는데, 명령을 받은 그날 밤 강력한 적이 7사단의 좌측방에 있는 형제봉(兄弟峰)과 박지산(博芝山) 일대로 밀고 내려왔으므로 7사단과 수도사단의 전투지경선 사이에 있는 그 발왕산과 형제봉을 기습점령하여 적의 남진을 그 선에서 저지하려 했다. 나는 3월 4일 새벽 4시를 기해 3대대를 좌일선에 배치하여 봉산리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예비인 1대대로 하여금 2·3대대의 도하를 지원하게 한 다음 연대본부가 위치한 정선에 머물러 있게 했다.

 

  그 다음날(3월 6일) 새벽 2시경 2대대는 중간목표인 오적산(五賊山)과 새수터의 783고지를 거쳐 발왕산을 점령하고, 3대대는 불당골의 1104고지와 산지골의 1008고지를 거쳐 봉산리를 점령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3대대 정보장교 진두태(陳斗泰) 소위는 자신의 출생일인 3월 7일 1개 분대의 정찰대를 진두지휘하여 박지산에 대한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적의 저격탄을 미간(眉間)에 맞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과거 해병대가 제주도에서 한라산의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할 때 932부대(전투정보대)의 고급하사관으로서 전설적인 용맹을 떨쳤던 그는, 그날 아침 동기생(해군 3기생) 김익태(金益泰) 소위를 자기방카에 초대하여 간소한 생일 밥상을 들었다고 했는데, 그것이 곧 이승에서의 마지막 식사가 되고 말았다.

 

  한편 3월 6일 여량리 북방 약 3킬로 지점에 있는 중동(中洞)에 적이 침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나는 그 적을 섬멸하기 위해 1대대를 여량리(餘糧里)로 전진(轉進)시켰는데, 그 다음날 새벽 1시경 1대대가 여량리 북방 3킬로 지점에 있는 덕가래밭으로 진출했을 때 중동의 적이 이미 그 남쪽에 있는 고비덕산(△1020)을 점령하고 있는 듯 했으므로 나는 1대대로 하여금 고비덕산(高飛德山)을 공격하게 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