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12. 재출동(再出動) (9) 고비덕산의 적

머린코341(mc341) 2014. 8. 7. 09:22

국방의 멍에 - 12. 재출동(再出動)

 

(9) 고비덕산의 적

 

  1대대가 고비덕산을 공격하기 직전 나는 이러한 광경을 목격했다. 즉 그날 오후 석양이 뉘엿 뉘엿 타오를 때 여량리의 연대본부를 경비하고 있는 1대대 3중대장 강용(姜勇) 중위와 사주방어를 하고 있는 3중대의 방어진지를 둘러보고 있던 나는 때마침 붉게 물들여져 있는 그 백설의 고비덕산 위에 가뭇가뭇한 미생물과도 같은 물체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수상쩍은 그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여량리 부근에 배치되어 있는 육군 28연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고비덕산에 혹 아군이 배치되어 있는가를 물어 보았더니 자기네 연대의 일부 병력이 배치되어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해병연대의 지휘소와 28연대의 지휘소간에 가설되어 있던 그 유선전화(EE8)는 내가 여량리에 도착한 직후 28연대 측에서 인접부대와의 정보교환을 위해 전화선을 끌어옴으로써 가설된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시험통화를 통해 인사를 나누게 된 육군 28연대장이 과거(통위부 시절) 내가 해안경비대 묵호기지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통위부로부터 파견된 경리장교로서 함께 근무한 적이 있던 이창정(李昌貞) 중령이었다.

 

  그래서 그와 나는 반가운 해후를 하게 된 셈이었는데 내가 여량리에 있는 동안 간혹 그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냉면을 같이 먹자는 말을 했었다.

  한데 그러한 일과는 상관없이 고비덕산 서북방의 덕가래밭에 진출해 있던 1대대 1중대는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눈이 내리고 있는 가운데 고비덕산으로 향하던 중 그 고지의 8부 능선에 배치되어 있는 자들로부터 사격을 받았다. 그러한 상황을 대대장으로부터 보고받게 된 나는 재차 28연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분명히 28연대의 병력인가를 물어 보았더니 여전히 그럴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럴 것이라고 말한 연대장의 말에 어딘지 모르게 신빙성이 결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나는 혹시 연대에서 배치해 둔 병력이 임의로 철수를 해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대대장에게 총대에 태극기를 매달아 흔들어 보고 그렇게 해도 계속 사격을 하거든 적인줄 알고 공격을 하라고 했더니 잠시 후 무전기를 통해 대대장은 태극기를 흔들어도 사격을 하는 것을 보니 우군 병력이 아니라 분명이 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날은 이미 날이 저물었으므로 1중대는 진출해 있던 선에서 사주방어를 하고 있다가 그 다음날 미명을 기해 공격을 재개한 끝에 무난히 그 고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그런데 1중대가 진출한 선에서 사주방어를 하고 있던 그날밤 여량리에서는 이러한 일이 있었다.

 

  즉 밤 11시경 헤드라이트를 켠 30~40대의 차량(트럭)이 여량리로 질주해 오더니만 책임자 되는 육군장교가 차에서 내려 나에게 동해안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물었다. 그래서 내가 설사 길이 있다고 해도 밤중에 적정이 불명한 상황에서 어찌 강릉 갈수 있겠냐고 했더니 그 장교는 차량들을 회전시켜 왔던 길로 되돌아가고 말았는데, 그 다음날 1대대가 고비덕산에서 생포한 포로들을 심문한 결과 그날밤 식량을 획득하기 위해 여량리를 공격하려고 했던 고비덕산의 적(북괴군 23유격여단의 잔존병력)이 그 작전기도를 실행하지 못했던 이유가 곧 그날밤 헤드라이트를 투사하며 여량리에 도착했다가 돌아간 그 수십대의 차량이 필시 많은 증원병력을 수송해 왔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했으니 나에게 있어서는 그 차량들이 구세주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1대대가 고비덕산을 공격하자 그 고지에 배치되어 있던 약 300명의 적들 가운데 60여명은 해병들에게 생포를 당하고 나머지 병력은 필사적으로 왕재산(王栽山) 쪽으로 도주했다가 때마침 왕재산 산록에 배치되어 있던 육군 29연대에 의해 거의 전원 생포를 당하고 말았다. 정예를 자랑하던 북괴군 23유격여단의 잔존 병력이 그러한 종말을 고하게 되었던 것은 추위와 기아가 극도의 피로로 인해 반죽음을 당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1대대가 고비덕산을 점령했던 그날 오후 나는 1대대장 공정식 소령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무전연락을 받고 별 희안한 구경거리가 다 생겼구나 싶었는데, 대대장의 보고에 따르면 고비덕산에서 생포한 포로들 가운데 여군포로가 하나 있어 철저한 몸수색을 위해 발가벗겨 놓았으니 와서 구경을 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생긴 여자이기에 초대를 하는가 싶어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나긴 했으나 지휘소를 비울 수가 없어 가보지는 못하고, 다른 포로들과 함께 속히 후송을 하라고 했다. 그 후에 보고된 바에 따르면 무슨 고생을 얼마나 했기에 젊은 그 여자 포로의 몸에는 끔찍한 상처가 많았다고 한다. 내가 여자포로를 빨리 후송하라고 했던 것은 진중에 억류해 둘 경우 말썽이 빚어질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해병대의 전 병력이 제주도로 이동했을 때 신현준 사령관은 여자를 가까이 하면 패가망신 하니 절대로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 적이 있었는데 신 사령관의 그러한 훈시가 있은 후 특히 진중에선 더욱 그런 일이 없도록 단속을 해 왔었다.

 

  이런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해 1월 하순경 해병 제1연대가 영덕에 상륙한 후 계속 연대 후방 CP에 머물고 있던 신현준 사령관이 정선(旌善)에 도착한 그 다음날 아침 언덕 위의 마을에 연기가 나고 있는 이유를 보고받고 격분을 했다는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해 둔다.

 

  즉 주민이 살지 않는 마을에서 연기가 나고 있는 것을 수상쩍게 생각했던 신 사령관은 주계장을 불러 그 까닭을 조사해 보라고 지시를 했는데, 그 마을을 다녀 온 주계장이 육군공병대 장병들이 이북에서 데리고 온 여자들과 살림을 살고 있더라고 보고를 하자 신 사령관은 '저런 놈들이 어디 있나!'하며 격노를 했다는 그러한 얘기이다.

 

  한편 3월 9일 3군단 본부에선 3군단에 배속된 3사단을 전력에 많은 타격을 입은 7사단의 우일선 연대인 5연대 지역에 투입하여 과감한 반격전을 시도하게 됨에 따라 해병 제1연대는 작전상 일시 3사단에 배속이 되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