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12. 재출동(再出動)
(11) 설산(雪山)의 고전(苦戰)
여량리로부터 발왕산(△1458)과 봉산리 및 용산리와 횡계리를 거쳐 차항리로 진격해 가는 동안 해병들은 뼈저리는 고생들을 했다.
즉, 영월지구에서는 건너야 할 하천과 강이 많아 죽을 고생들을 했지만 고산준령으로 이어져 있는 그 여량-차항리 간의 산악지대에서는 길길이 쌓인 눈과 추위와 통신과 식량보급의 두절 때문에 그러한 고생들을 겪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1·4후퇴 때 서울 시민들이 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를 걸어서 건넜던 사실이 그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발왕산을 넘어갈 때 2대대에서는 이런 일을 겪었다. 즉 흰눈이 길길이 쌓여 있는 험준한 산등성이를 밤중에 넘다가 81밀리 박격포의 포신을 어깨에 멘 화기중대대원 한 사람이 발이 미끄러져 그 포신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그 무거운 포신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골짜기로 굴러 내리는 소리 때문에 혹시 적이 아군의 부대이동을 감지하지나 않을까 해서 마음이 조마조마 했고, 또 굴러 떨어진 그 포신을 찾아 내느라 길이 막혀 그 후속부대 장병들이 추위에 떨며 두 시간 동안이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해병들이 발왕산을 넘어 횡계리로 향하는 동안 부연대장 김두찬 중령은 KSC(민간인 노무자)를 동원해서 고지위의 대원들에게 주먹밥을 지게에 지고 운반해 주고 있었는데, 지게를 진 그 KSC틀이 눈이나 눈 밑에 자욱히 깔려 있는 낙엽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그 주먹밥을 죄다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래서 사정이 딱하게 된 김 중령은 3군단본부로 가서 참모장 심원봉(沈元奉) 준장에게 그러한 얘기를 하고 L-19기를 이용해서 고지위의 대원들에게 주먹밥을 좀 공급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심 준장은 선뜻 그 요청을 받아 들이지를 않았다.
그래서 김 중령은 배속된 부대를 위해 그 정도의 청도 들어 주지 못하겠냐며 끈덕지게 요청을 거듭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엔 언쟁이 벌어져 끝내는 심 준장이 권총을 뽑아 들고 더 이상 성가시게 굴면 쏴 죽이겠다고 하자 김 중령은 '쏠테면 쏴 보시오!'하며 대들어 분위가 자못 험악해졌으나 마침 김두찬 중령의 고향(평양) 후배인 군수참모 백선진(白善鎭) 대령이 들어서서 가까스로 분위기를 수습해 주고, 또 L-19기를 동원해서 한 차례 주먹밥도 공급해 주었다.
그 기간중 동체에 태극마크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한국 공군 수송기 몇 대가 날아와서 실탄상자와 K레이숀 상자를 투하한 일이 있었으나 그 보급품 상자들이 적진에도 떨어지고 아군쪽에도 떨어지는 바람에 가까스로 허기를 떼울 수 있을 정도였다.
바로 그 무렵에 생산이 된 깡통제품인 '케이레이슨'이란 국산품 야전식량은 쇠고기도 넣고 도라지나물과 고사리와 콩나물 등을 밥과 함께 비벼가지고 통조림을 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깡통채로 모닥불에 뎁혀서 먹거나 깡통을 따서 그 속의 것을 수통컵이나 철모에 부어가지고 뎁혀서 먹어 보니 그 맛이 일품이었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아쉽게 여겨졌던 것은 그 깡통들을 담은 나무상자나 양철로 된 그 깡통의 질이 너무 떨어져서 비록 낙하산에 매달려 투하되긴 했지만 암석지대에 떨어진 것은 그 상자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약 3분의 1가량의 깡통은 심하게 망가지거나 깨어져서 먹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봉산리와 발왕산으로 진출했던 3대대와 2대대 장병들은 식량보급이 두절되어 중대장과 소대장들이 대원들의 휠자켓 주머니속에 들어 있는 콩이나 옥수수 등을 구걸하듯 얻어 먹고 끼니를 이은 적도 있었고, 추위속에서 날콩이나 날강냉이 알을 씹어 먹고 설사를 하게 된 2대대 화기중대의 한 대원은 부득불 모박불을 피워 놓고 젖은 엉덩이와 똥칠갑을 한 속옷들을 말리고 있다가 옆에 않아 있던 전우의 오발탄을 맞아 엉덩이에 중상을 입고 쓰러지는 바람에 중대장이 마치 야전 상여같은 큼직한 들것을 만들어 1개 분대의 대원들을 동원하여 그 중상자를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대대본부 구호소까지 후송시킨 일도 있었다.
또한 우군부대(7사단의 일부 병력)의 갑작스런 철수로 봉산리의 전방산악지대에서 고립이 되고 말았던 3대대 장병들은 수일간 보급이 단절되고 통신이 두절된 채 먹을 것이 없어 아사지경에 이르렀는데, 그때 설산을 헤매고 있는 황소 한 마리가 있어 그 소를 잡아 소금도 간장도 없이 다만 주먹만큼한 크기로 썰어서 맹물에 삶아서 먹은 것이 체해 죽을 고생을 했던 3대대장 김용국(金龍國) 소령은 그때의 일이 얼마나 서러웠고 혼이 났던지 그 후 20여년간 현역으로 있을 때나 예편을 한 후에 있어서나 쇠고기가 든 음식물은 절대로 먹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겪었던 일도 생각이 나는데 나의 당번병이 땅 속에 파묻어 놓은 민가의 된장단지를 들춰 내어 그 속에 들어 있는 장아찌, 콩잎사귀, 그리고 깻잎 등을 가지고 왔을 때 그 맛이 어쩌면 그렇게도 꿀맛 같았는지 지금도 나는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또한 나의 기억속에는 지워지지 않을 만큼 깊이 새겨져 있는 인상깊은 모닥불의 영상이 남아 있다.
그 영상은 밤마다 육군이 배치되어 있는 고지나 평지에 옆으로 열을 지은 긴 행렬처럼 타고 있던 모닥불인데, 그러한 모닥불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되었을 때 나는 어째서 아군의 진지를 저렇게 노출시키는가 하고 의아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적이 7사단과 9사단의 전투지경선 사이를 뚫고 침투해 올 수 있었던 것도 모닥불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또 만약에 모닥불을 피해 후방으로 침투한 적이 여기 저기서 요란하게 총을 쏴 대기만 하면 모닥불을 피워 놓은 전방진지들은 졸지에 혼란 속에 빠져 붕괴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그 이유가 추위 때문이라는 말을 전해 들은 나는 육군의 보급품 사정이 얼마나 형편이 없는가를 비로소 알 수가 있었다.
북진을 할 때 우리 해병대는 미 해병대로부터 휠자켓 외에 유엔잠바나 파카니 하는 따뜻한 동복과 검정색 설화(雪靴) 등을 보급받았었기에 그 혹한의 북한 땅에서 단 한명의 동사자(凍死者)가 발생하는데 그쳤지만, 나의 눈에 몹시 의아스럽게 비쳐졌던 그 모닥불의 야경이 증언해 주고 있듯 육군의 사정은 그렇지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여량리에 도착했던 날 그곳에서 9사단 부사단장 김종면(金宗勉) 대령을 만났었는데, 그때 김 대령은 나와 인사를 교환하면서 이런 말을 한 생각이 난다. 즉 영월지구에 와서 잘 싸워 주고 있는 해병대가 고맙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고 말한 그는 물론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육군에서 사단장을 하느니 차라리 해병대의 대대장을 하고 싶다는 말을 했었는데, 결국 육군과 해병대는 사기(士氣)와 보급 그리고 전통정신 면에서 그만큼 비교가 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그리고 그때 나는 사단장 김종갑(金鍾甲) 준장, 참모장은 박정희(朴正熙) 중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송계리의 CP에 있는 사단장과 결혼문제로 휴가중에 있어 참모장은 만나보지를 못했었다.
한편 육군의 입장과는 달리 어떠한 경우에도 야간에 불을 피우지 못하게 했고 또 불을 피우지 않고서도 추위를 견뎌 낼 수 있었던 해병들은 불을 피우지 않은 데 대한 보너스 조로 간혹 이런 혜택을 누럴 수가 있었다. 즉 모닥불이 없는 지대로 침투를 하면 아군이 없는 줄을 알고 침투해 오던 적병들이 그 길목에 복병처럼 배치되어 있는 해병들과 조우하여 큰 코를 다치거나 혼비백산한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던 것이다.
3월 12일 정오경이었다. 수일간 눈구덩이 속에서 잠을 자며 오로지 두 다리로만 걸어서 해발 1458미터의 발왕산 꼭대기에 올랐던 나는 특히 며칠간 길길이 쌓인 험준한 설산의 눈구덩이 속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그 동북방, 지금의 용평 스키장 너머로 내려다 보이는 횡계리에서 대관령으로 이어져 있는 마치 검은 띠를 두른듯이 설경속에 선명하게 들어나 있는 새까만 흙길과 그 흙길 위를 달리고 있는 한 대의 군용차 같은 차량을 바라보며 반가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흙길과 차량을 바라보면서 나는 드디어 지옥전선과도 같은 전선을 돌파하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또한 영월지구에서 작전을 하는 동안 하진부리에서 창궐한 장질부사가 차츰 그 인근지역으로 만연되어 설상가상 장병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바람에 연대본부 의무실에서는 자체 예방을 위해 각별한 신경을 쓰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는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져 있는 '다이아진'을 가지고 치료를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산간벽지에서는 몇 가구 안되는 부락민 전체가 그 전염병에 걸려 쓰러져 있는 곳도 있었다.
한편 3월 13일 횡계리 서북방의 차항리 선까지 전진했던 해병 제1연대는 3월 15일부로 미 9군단 소속 미해병 제1사단으로 배속이 변경됨에 따라 작전지역을 육군 3사단 22연대에 인계하고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흥천(洪川)으로 떠났다.
차항리에 진출해 있는 동안 해병들은 미군 수송기들이 부대를 잘못 찾았던지 특별히 주문한 적이 없었는데도 한 차례 차항리 상공으로 날아와 상당량의 실탄상자와 식량상자를 떨어뜨려 주는 바람에 부족한 실탄도 보충하고 C레이숀도 포식할 수 있었다.
또한 차항리에서 머물고 있는 동안 나는 발왕산을 넘어 올 때 연대 후방 CP의 주계병 신영철(申英撤) 1등 수병이 여러 명의 대원들을 데리고 운반해 왔던 분대천막을 치게 했는데, 그 분대천막은 부연대장 김두찬 중령의 지시로 눈이 내려 길도 없는 설원과 설산을 헤매며 운반해 온 것이었다.
해병대가 차항리를 떠나던 날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제일 먼저 생각했던 것은 영월지구 전선에서 수행했던 해병대의 임무와 역할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었다.
처음부터 일정한 방어정면이나 공격정면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우군부대(육군사단)간의 전투지경선 사이를 뜷고 침투한 적을 섬멸하여 그 간격을 메꾸거나 우군부대 전선의 일부를 돌파한 적을 섬멸하여 돌파당한 전선을 회복시켜 반격에 임하게 하는 역할을 전담했던 것인데, 그러한 임무를 앞에서도 언급을 했듯이 건너야할 강도 많고 하천도 많은 지역에서, 그리고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과 백설이 길길이 쌓여 있는 험준한 산악지대, 수일간 식량보급도 단절되고 통신도 두절이 된 그러한 역경 속에서 오로지 연대 자체의 화력만으로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은 참으로 자랑스런 일이 아닐 수가 없었고, 또한 지옥전선과도 같은 설한지(雪寒地) 작전을 통해 해병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무한한 인내심과 필승의 감투정신을 길렀던 것으로 나는 자부하고 있다.
그리고 영월지구전선을 회고할 때마다 나는 제주도 출신 학도병들이 발휘했던 불굴의 감투정신을 기억하게 된다. 그 당시 해병 제1연대의 구성원들 중에는 사병들의 약 90%가 제주출신 학도병들이었는데, 그들은 모두가 성실하고 용감하고 충성심이 강한 전우들이었으므로 그들 가운데서는 단 한 명의 도망병도 발생하지 않았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해병대 사령관 글 > 4대사령관 김성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방의 멍에 - 13. 홍천·화천지구 전투 (2) 학곡리(鶴谷里)의 씨름판 (0) | 2014.08.10 |
---|---|
국방의 멍에 - 13. 홍천·화천지구 전투 (1) 가산리 전투(加里山 戰鬪) (0) | 2014.08.10 |
국방의 멍에 - 12. 재출동(再出動) (10) 최석 장군(崔錫 將軍)과 3C (0) | 2014.08.10 |
국방의 멍에 - 12. 재출동(再出動) (9) 고비덕산의 적 (0) | 2014.08.07 |
국방의 멍에 - 12. 재출동(再出動) (8) 정선지구 전투(旌善地區 戰鬪) (0) | 2014.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