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13. 홍천·화천지구 전투 (1) 가산리 전투(加里山 戰鬪)

머린코341(mc341) 2014. 8. 10. 07:23

국방의 멍에 - 13. 홍천·화천지구 전투

 

(1) 가산리 전투(加里山 戰鬪)

 

  해병 제1연대가 횡성(橫城)을 거쳐서 미 해병제1사단의 작전지역인 홍천으로 이동 집결했던 날짜는 2월 18일이었다. 3월 15일 횡성에서 홍천으로 진출했던 미 해병사단은 그때 이미 홍천북방 약 10킬로 지점까지 진출해 있었고, 그 좌측방에는 미 제1기갑사단(9군단), 우측방에는 미 2사단(10군단)이 각각 연계되어 있었다.

 

  유엔군의 주축인 9군단과 10군단의 이와 같은 전진은 3월 7일부터 감행된 대대적인 반격작전(작전명칭-Ripper)에 따라 이루어졌던 것인데, 그 리퍼작전의 성공적인 수행으로 서부전선에서는 아군이 일제히 한강을 도하하여 북진을 계속중에 있었고, 중부전선에서는 3월 14일 서울을 탈환했다.

 

  그리고 중부전선의 미 9군단 중심부는 2월 공세로 원주(原州)와 지평리(砥平里-양평군)를 점령했던 중공군 39군과 69군을 격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 춘천 북방의 38선을 향해 전진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와 같은 상황속에서 홍천에 집결한 해병 제1연대에 부여된 새로운 임무는 카이로(Cairo) 선상의 공격목표인 K와 L과 M, 즉 가리산(加里山-△1051)을 정점으로 하여 그 동남쪽으로 연해 있는 975고지와 787고지 등의 고지군(高地群)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가리산(목표-M)은 홍천과 춘천 및 인제를 연결하는 삼각 도로상의 중간에 위치하는 작전상의 요지로서 이 고지를 점령하게 되면 중부의 교통요지인 춘천과 인제까지 진출할 수 있는 계기가 조성될 수 있었다.

 

  당시 홍천 북방에는 패퇴를 거듭한 중공군 39군과 69군이 새로운 공세준비를 위해 이미 38선 이북으로 후퇴해버린 뒤였고, 그 대체부대로 투입된 북괴군 6사단과 13사단이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하여 주력부대의 후퇴를 엄호하고 있었다. 그 6사단은 1950년 5월초순 진동리지구에서 대적한 적이 있는 말하자면 나와는 구면에 속하는 부대였다.

 

  3월 19일 오후 4시경 미 해병사단 지휘소에서 명령을 수령했던 나는 지체없이 복안을 세워 예하 대대장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즉 공격개시일과 시간은 3월 21일 오전 8시 주공부대인 2대대(우일선)에는 가리산을 공격 점령하라는 임무를 부여하고 조공부대인 3대대(좌일선)에는 K와 L을 점령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그리고 출발선 게시선은 미 해병대의 진출선인 버팔로(Buffallo)선으로 선정하고 예비대인 1대대는 연대 지휘소가 위치한 구성포리(九成浦里)에 위치하도록 했다.

 

  한편 당시 연대의 우측에는 미 해병 1연대, 좌측에는 미 해병 5연대가 병행공격을 하고 미 해병 11연대(포병) 3대대가 연대를 직접 지원하게 돼 있었다.

 

  공격 첫날엔 21일 아침 8시, 우군 포화의 지원하에 공격을 개시했던 2대대와 3대대는 최초의 중간목표인 7과 8, 그리고 17과 18을 점령한 다음 22일 3대대는 난공의 지대인 목표 M을 공격하기에 앞서 중간목표인 710고지를 점령하고 3대대는 목표 K를 점령하여 좌측의 미 해병 5연대와연 계를 지었다.

 

  그리고 23일 2대대는 목표 M일대를 공격하고 3대대는 약 1개 대대의 적이 781고지에서 저항을 하고 있었으므로 852고지와 916고지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런데 그 당시 목표 M일대에는 속칭 흑룡강(黑龍江)부대라고 하는 수백 명의 적이 975고지와 627고지의 급사면을 이용하여 방어에 임하고 있었는데 아군이 공격하기에는 매우 불리한 지형이었다.

 

  그래서 2대대장은 일단 627고지를 제압한 후에 975고지를 공격할 계획하에 6중대로 하여금 627고지를 공격하게 한 다음 7중대를 975고지 공격에 투입했으나 6중대와 7중대 공히 공격에 실패하게 됨으로써 그날밤 2대대는 나의 승인하에 해병대에서는 처음으로 야간공격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그 야간공격에는 예비대로 있던 5중대와 7중대가 투입이 되었는데 그날밤 9시 30분경 627고지를 점령한 5중대는 그 여세를 몰아 난공의 975고지를 공격했고, 그때 7중대는 5중대와 합세하여 975고지를 남북으로 협공하기 위해 은밀히 975고지의 후방으로 우회해 있다가 중대와 합세하여 협공을 감행한 끝에 마침내 그 난공의 975고지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날밤 5중대장 이병문(李丙文) 중위는 적의 판단을 기만하기 위해 전방소대에 대해서는 대응사격을 중지시키고 예비소대에는 개인호를 파게 함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아군이 공격을 중지한 것처럼 가장했다가 불시에 적의 허를 찔러 돌격을 감행함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한편 2대대가 975고지를 점령하자 나는 예비대인 1대대에 최종목표인 가리산 공격임무를 부여했다. 그때 가리산의 적은 목표 M일대를 점령한 2대대와 목표 L일대를 점령한 3대대로 인해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백이동(栢二洞) 일대에서 수색과 정찰임무를 수행하고 있던1대대는 후방경계를 2대대에 인계하고 24일 아침 9시 '판내리기'에 집결한 다음 790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오후 8시경 이 고지를 점령했고, 그 다음날 25일 아침 8시부터는 가리산을 공격한 끝에 오후 1시경 마침내 최고봉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가리산을 점령한 해병 제1연대는 전방지대에 대한 수색과 공격을 병행한 끝에 그날 오후 3시경 1대대는 914고지를 점령한데 이어 883고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26일) 미 해병사단에 배속되어 뉴카이로선까지 진출했던 해병 제1연대는 4월 1일에는 그 전방에 있는 레디(Redy)선까지 수색전을 벌이다가 4월 3일 전병력이 레디선까지 진출한 다음 명령에 의해 미 7사단 32연대와 미 2사단 22연대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새로운 작명을 수행하기 위해 춘천방면으로 이동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