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14. 중공군(中共軍)의 대공세(大攻勢)
(4) 생사(必死)의 탈주(脫走)
후방으로 내려가게 된 나는 강릉 근처에 있는 처가에 소식이 궁금하여 가는 길에 처가에 들려 본 다음 2월 중순경 해병 연대가 상륙을 했던 묵호와 삼척, 울친 등 영월지구로 이동할 때 거쳐갔던 그 동해안 도로로 해서 남쪽으로 내려갈 작정을 했다.
나의 처가가 있는 곳은 강릉 남쪽 약 10킬로 지점에 있는 정동진(正東津)이었다. 그 정동진(명주군 강동면)은 북괴군이 남침했을 때 육전대 병력이 상륙을 한 마을이었다.
나와 동행을 한 대원들은 지프차 운전병 주정하 3등병조와 전령 양상국 1등수병 두사람이었다. 주정하 하사관은 원산 출신이었고, 양상국 수병은 제주도 출신이었다.
그리고 지프차에 달린 트레일러에는 내가 간혹 사용을 했던 목침대와 의낭, 그리고 두 대원의 의낭 등이 실려 있었다.
홍천에서 강릉으로 가기 위해서는 횡성을 거쳐 속사리(束沙里-평창군 용평면)-하진부리-대관령으로 이어져 있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의 도로사정은 앞에서도 언급된 바 있듯이 1차선인데다 워낙 군용차들의 내왕이 심했던 비포장 도로였으므로 말할 수 없이 험한 편이었다.
그런데 그날 5월 11일 오후 3시경 지프차가 속사리 서쪽 약 3~4킬로 지점에 이르렀을 때 나는 도로 우측 야산지대의 남쪽 사면에 포진한 미군들의 105밀리 포진지에서 야산 너머의 북쪽 방향으로 사격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한 광경을 목격했던 나는 멀지 않은 곳에 적정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지점을 통과하여 마침내 삼차로(三叉路)가 있는 속사리를 거쳐 바야흐로 하진부리로 넘어가는 꾸불꾸불한 속사리 고개로 접어들게 되었는데, 그 속사리 고게 입구에서 나는 오른쪽 산모통이 길옆에 정체를 분간할 수 없는 약 20명의 무장한 사람들이 있는 것을 목격했다.
누비옷을 입고 있는 그들의 어깨에는 돌돌 말린 모포가 걸려 있었고, 어깨와 손에는 장총과 다발총이 메어져 있거나 들려져 있었는데, 더러는 앉은 채로 쉬고 있었고, 더러는 걸어다니며 유선줄을 가설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을 본 순간 나는 필시 노획무기를 소지한 전투경찰이나 후방에서 유선가설작업을 하고 있는 육군장병들이려니 하는 생각을 하고 그 고갯길 모퉁이를 통과하며 꼬불꼬불 커브로 이어져 있는 고개 중턱으로 차를 몰고 가게 했는데, 정체를 분간할 수 없는 그러한 무리들은 그 고개중턱 길옆에서도 또 한 차례 목격이 되었으나 그때도 나는 내가 탄 지프차를 멍청하게 바라보거나 아예 외면을 하고 있는 그들처럼 별다른 생각없이 지나왔으나 잠시 후 차가 고개의 8부능선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나는 문득 이러한 느낌이 들어 차를 세우게 했다.
나로 하여금 이상한 느낌을 갖게 했던 것은 그 고갯길에 소나기가 와서 흙먼지가 자욱히 쌓여 있는 길바닥 위로 햇볕이 말라 있는 왕관(王冠)모양의 빗방울 떨어진 자국을 도처에 있었으나 아군의 군용차량이 가장 많이 내왕해야 할 간선도로에 차량이 지나간 바퀴자국이 전혀 없었던 점이었다.
불현듯 그러한 느낌을 갖게 되었던 나는 혹시 내가 위험한 지대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도로 좌측 골짜기에 외딴 움막집이 한채가 있기에 혹 거처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궁금한 것을 물어볼까 해서 차에서 내려 그 움막집으로 가 보았더니 집에는 사람이 없고 그 움막집 뒷쪽 밭뙈기 옆에 있는 가시넝쿨 속에 한 가족으로 보이는 5~6명의 식구가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손에 낫을 들고 앉아 있는 50대의 가장(家長)을 불러내어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어 보았더니 경상도 말을 하는 내가 분명히 국군장교로 보였던지 어떻게 해서 이 위험한 곳으로 들어서게 되었냐고 하면서 바로 엊그제 이 일대에서 큰 싸움이 벌어져 미군들은 남쪽으로 후퇴해 버리고 지금 이 일대에는 이북 군인들이 깔려 있으니 속히 왔던 길로 되돌아 가라고 했고, 또 지금 하진부리에는 더 많은 이북 군인들이 있다고 했다.
그로부터 그러한 말을 들은 나는 속사리 고개의 입구와 잠시 전 지나왔던 그 고개중턱 도로 옆에 있던 누비옷을 입은 자들이 전투경찰이나 육군이 아니라 증공군이나 북괴군 병사들이란 것을 직감하고 전신에 소름이 쪽 끼치는 것을 느꼈다.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던 나는 운전병에게 차를 되돌리도록 지시를 했다. 운전병은 전령의 도움을 받아 트레일러를 분리시킨 다음 어렵게 차를 돌려 세워놓고 다시 트레일러를 뒷꽁무니에 연결시켰다.
그런 다음 함께 승차했던 세 사람은 지프차 한 대에 목숨을 의지하여 왔던 길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출발을 하기에 앞서 나는 운전병에게 이런 지시를 했다. 즉 지금부터 정신을 바짝차리고 전속력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과 가는 도중 만약에 연대장이나 전령이 다치거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사적으로 차를 몰고 내려 가라고 했다. 생포를 당한다는 것은 죽기보다 더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권총을 빼들고 실탄 장진을 했는데 만약에 운전병이 부상을 입거나 차가 곤두박혀 최후를 맞을 경우에는 끝까지 저항을 하다가 자결을 할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필사의 탈주가 시작이 되었는데, 차가 고지 중턱을 통과할 때 그때서야 우리를 수상쩍게 여겼던지 그곳에 있던 7~8명의 누비옷들이 별안간 길옆으로 다가와서 불과 10미터 거리에서 질주하고 있는 차를 향해 방망이수류탄을 던지고 있었다.
그 섬찟한 찰라에 나의 정신을 전류가 흐르듯이 오싹하고 아찔했으나 하늘이 도왔던지 그들이 던진 수류탄 가운데 겨우 서너개는 차체 옆쪽에 부딪혔다가 굴러 떠러지며 터지는 것 같았고, 나머지는 차체에 못미친 곳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차가 일차저지선을 돌파한 직후 고개의 우측 고지로부터 갑자기 적의 기관총이 불을 뿜고 있었으나 어찌 된 셈인지 그 기관총의 실탄 역시 지프차의 앞뒷쪽과 도로 좌측방의 노변에 빗발칠 뿐 단 한발도 차상의 사람들을 사상(死傷)시키지 못했고, 또 그 도로에 있던 누비옷 입은 병사들이 던진 수류탄 역시 일부는 차체 옆쪽에 부딪혀 튕겨 나가고 일부는 차체에 못미친 곳에 투척되고 있었으니 참으로 기적적인 일이 아닐수가 없었다.
그날 극적으로 사지(死地)를 탈출했던 나는 문득 길가에 있던 그 누더기옷들이 장총이나 다발총을 가지고 사격을 했더라면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를 못했을 텐데 어째서 수류탄만 가지고 공격을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 보았는데, 그러한 의문에 대해 나는 혹 그들이 실탄이 떨어져서 그렇게 했던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한편 그날 나는 횡성으로 되돌아가서 원주, 제천을 거쳐 남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속사리 서쪽 105밀리 포진지가 있던 그 길목에 무장한 1개 분대 가량의 미군들이 있기에 차를 세웠더니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다가와서 수류탄과 실탄이 튕긴 흔적이 역력한 차체를 눈여겨 보고 나선 나의 소속과 계급을 물어 보았다.
그리곤 어떻게 해서 속사리쪽으로 가게 되었냐고 하기에 적정이 없는줄 알고 갔다가 적이 있어 되돌아 가는 길이라고 했더니 '유 아 베리 럭키 맨'이라고 말하면서 잘 가라며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나는 여러 차례 속사리를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1951년 5월 11일에 겪었던 필사의 탈주를 머리속에 떠올리며 그때 나와 함께 그 죽음의 저지선을 돌파했던 그 두명의 대원들 생각도 했고, 또 나를 가호해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드리곤 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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