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14. 중공군(中共軍)의 대공세(大攻勢)
(3) 결사적(決死的)인 철수엄호(撤收掩護)
23일 오후 2시경이었다. 철수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1대대의 전방 지휘소에선 2대의 우군기(미 해병대의 콜세아 전폭기)가 날아와선 기총소사와 네이팜탄으로 공격을 하는 바람에 반가워서 능선위로 올라가 총대와 손을 흔들어 대며 환성을 터뜨리고 있던 대원들 가운데 4명이 중상을 당하는 헤프닝이 발생했다. 대대본부에 있던 항공연락장교가 즉시 통신교환을 하여 제지를 했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더 큰 피해를 입을 뻔 했었다.
미 해병대의 조종사가 오폭을 하게 되었던 것은 간밤에 있었던 중공군의 대공세로 북한강 북쪽에는 아군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을 듣고 무조건 공격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러한 오폭사고가 발생한 후 연대내에는 공정식 대대장의 등에 네이참탄의 불통이 튀어 불이 붙었다느니 작전장교 서정남 중위의 다리에 불이 붙었다느니 하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한편, 1대대가 고립된 상황속에서 고군분투하며 날을 밝힌 다음날 아침 나는 예비대인 3대대의 엄호하에 1대대를 철수시킬 결심을 했다.
그리하여 1대대는 그날 오후 2시경 3대대 10중대가 1대대의 전방 능선에 진출한 가운데 철수를 개시했는데, 1대대의 철수를 엄호하고 있던 3대대는 1대대가 빠져 나간 후에 들이탁친 증공군의 공격으로 축차적인 방어진지에서 밤을 세우며 격전을 치렀다.
그날 3대대는 10중대로 하여금 1대대의 전방진지를 점령하게 하고 11중대를 그 후방 제2선에 배치했다. 그리고 11중대에서 차출한 분대병력을 10중대와 11중대 어간에 배치하여 분초를 설치하고 예비중대인 9중대를 11중대 좌측후방에 배치해 두고 있었는데, 1대대가 철수한 직후 중공군이 물밀듯이 밀고 오자 10중대의 진내에선 백병전이 벌어졌고, 그 백병전의 와중에서 복부에 총상을 입고 쓰러져 있던 중대장 이동성(李東成)중위는 2명의 중공군에게 생포를 당했으나 그의 전령 고두선 해병의 응사와 자신의 기지로 그 두명의 중공군을 쓰러뜨려 그 위기를 모면했다.
혼전을 거듭하고 있던 10중대는 땅거미가 질 무렵 중기관총 사수들의 결사적인 엄호하에 미 해병5연대가 배치되어 있던 좌측방으로 빠져 나오게 되었는데, 10중대가 없어지자 중공군들은 일제히 약 300미터 후방에 위치한 11중대의 분초진지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분초진지에 배치되어 있던 대원들은 중화기중대의 지원 하에 소지하고 있던 실탄이 소진될 때까지 악착같이 버티고 있다가 본 진지로 철수하게 되었고, 분초진지가 없어지자 이번에는 11중대 진지에서 그 다음날 34일 아침 동이 틀 무렵까지 격전이 벌어졌다.
11중대 진지에서 벌어진 백병전에서는 중대장 박건섭 중위가 부상을 당해 쓰러지자 선임장교 육동욱 소위가 중대를 지휘하여 용감하게 적을 무찔렀고, 또 연대본부에선 계속 우군포의 지원을 요청하여 11중대를 엄호한 끝에 다음날 새벽 적의 공격을 일단 저지시켜 무사히 강변으로 철수, 그날 오전 9시 30분경 무사히 북한강을 도하하여 용화산(龍華山) 일대에 배치되었다.
1대대의 철수엄호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뿐 아니라 쇄도해 오는 적에게 막심한 피해를 입혔던 3대대의 용감성은 참으로 놀라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특히 최종 방어선에서 적을 격퇴시킨 11중대의 수훈자 10여 명에게는 을지무공훈장과 충무 및 실버스타 등의 푸짐한 훈장이 수여되었다.
그리고 북한강을 무사히 철수했던 해병제1연대는 용화산(龍華山) 일대에 포진하고 있다가 24일 오후 대거 북한강을 도하한 중공군들과 다시 한번 격전을 치른 다음 월곡리(月谷里)로 철수하여 홍천강(洪川江)을 주저항선으로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4월 22일 밤 10시를 기해 감행했던 춘기공세로 중공군은 서부에서는 구파발까지, 동부에서는 인제(麟蹄)와 현리(縣里)까지 밀고 내려왔고, 중부에서는 사창리를 돌파한 중공군의 주공부대가 6사단을 가평천(加平川)골짜기까지 밀고 내려 왔다가 그곳에서 영연방군(영국·호주·뉴질랜드군)의 선전감투로 격퇴를 당했다.
그리고 6사단의 붕괴로 북한강을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한·미 해병부대는 홍천강(洪川江) 이남으로 철수하여 5윌 말경까지 소양강 일대와 화천저수지 일대에 대한 수색과 정찰에 임하다가 새로운 작명을 부여받게 되었는데, 수색과 정찰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5월 11일 나는, 홍천군 남면 명동리(明洞里)에 위치하고 있던 연대본부에서 해병대사령부 참모장으로 있던 김대식(金大植) 대령과 임무를 교대하고 전선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4월 20일 춘천 북방으로 이동한 후 각 대대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즉 야채 결핍증이 걸린 대원들이 들과 산에 갓 돋아 난 산나물을 뜯어먹다가 배탈이 나서 설사를 하는 일이 간혹 발생하는 바람에 연대본부에서 산나물을 뜯어 먹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기까지 했다. 대원들이 채소결핍증에 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1951년 1월 하순경 진해에서 영덕으로 출동한 후 영월지구전투를 거쳐 화천지구 전투를 마칠 때까지 그 엄동설한과 이른 봄철에 야채 구경을 전혀 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연대본부 주계에서는 주민들이 있는 일선지구에서는 부식물을 조달할 수가 없어 1주일이나 열흘에 한 번씩 인천지구로 가서 조달해 왔었는데, 인천지구에도 역시 채소가 귀해 어쩌다 한번씩 구입해 온 김치를 각 대대에 공급해 주곤 했으나 그 양이 넉넉할 수가 없었다.
나 자신도 그랬던 것처럼 굵은 소금이 조금 묻어 있거나 약간의 날된장이 발린 주먹밥을 그나마 하루에 한 두 개, 때로는 2~3일에 한 두 개씩 먹으며 고된 전투를 해왔던 대원으로서는 따사로운 봄볕에 갓 돋아난 산나물을 염소들처럼 뜯어 먹고 싶을 수 밖에 없었겠지마는 문제는 배탈때문에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후임 연대장과 임무를 교대하게 된 나는 나의 두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바위 덩어리와 같이 무거운 짐을 벗어 놓은 것 같이 마음이 홀가분했다.
내가 1950년 7월 하순경부터 그 해 9월 하순경에 이르기까지 남원, 운봉, 함양, 진주, 진동지구 전투 및 통영상륙 작전을 수행하면서 지휘했던 병력은 약 400명에서 500명에 이르는 대대병력이었지만 1951년 1월 26일 진해에서 영덕지구로 출동했던 병력은 약 3500명이 되는 연대병력이었다. 따라서 나로서는 그만큼 더 무거운 지휘관의 책무를 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나의 심중에는 만감이 교차하여 그 감회가 컸었다. 눈물겹기도 했고, 또 말할 수 없이 가슴 뿌듯하기도 했다. 그 감회 속에는 특히 설한지의 지옥전선과도 같았던 그 영월, 정선, 평창지구 전투에서 겪었던 온갖 눈물겨운 일들에 대한 추억과 우리 해병들이 그 지옥전선에서 발휘했던 빛나는 감투정신과 긍지, 그리고 북한강을 배수진으로 한 그 화천지구전투에서 중공군 18만 대병력이 주축이 된 그 충격적인 대공세에 직면하여 좌인접 우군부대들이 소리도 없이 붕괴된 그러한 상황속에서도 필사적인 감투정신으로 홀로 고립이 된 최전방 진지를 끝까지 고수했고, 또 엄호부대의 필사적인 엄호와 축차적인 철수로 모든 병력이 무사히 도강하는데 성공했던 화천지구 전투에 대한 긍지가 함께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편 그러한 감회를 느끼면서 나는 나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모든 전우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고, 또 나라를 위해 함께 싸우다가 전사한 전우들의 영전에 경건한 마음으로 명복을 빌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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