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15. 용두산 사령부 (8) 해안봉쇄(海岸封鎖) 작전회의(作戰會議)

머린코341(mc341) 2014. 8. 13. 23:11

국방의 멍에 - 15. 용두산 사령부

 

(8) 해안봉쇄(海岸封鎖) 작전회의(作戰會議)

 

  1951년 10월 하순경이었다. 어느날 오후 부산항 외항 오륙도 부근 해상에 정박해 있던 전함 미조리호 함상에서는 해안봉쇄작전과 관련된 한·미 해군 고위 지휘관회의가 개최되었다.

 

  미 극동함대사령관 브리스코 제독(중장)에 의해 소집된 회의에는 해군본부측에서는 손원일 참모총장과 작전국장 이용운(李龍雲) 대령이 참석하고 해병대 측에서는 신현준 사령관과 참모장이 참석을 했다.

 

  2차 세계대전 말기(1944년)에 건조된 배수톤수 45,000톤급의 대형 전함인 미조리호는 1945년 9월 2일 도쿄만(東京灣)에 정박하여 그 넓은 갑판 일각에서 8월 15일에 항복을 하여 전쟁을 종식하게 했던 일본군의 항복문서에 조인을 한 역사적인 조인식을 거행했던 유서깊은 전함이었 또 1950년 9월 15일에 감행된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도 참가했다.

 

  그날 제1부두에서 피켓보트를 타고 전함 미조리호가 정박해 있는 곳으로 가게 되었던 우리 일행은 전장(全長) 271미터나 되는 거대한 전함의 갑판 위로 올라가 전함에 승조해 있는 함대해병대 군악대의 주악리에 브리스코 제독의 안내를 받으며 갑판 위에 도열해 있는 미 해병대 의장대를 사열한 다음 함정 내의 회의실로 안내되었다. 그날 산뜻한 정복차림을 한 함대해병대 군악대와 의장대를 난생 처음 대하게 되었던 나에게는 그들에 대한 인상이 너무나 좋았다.

 

  그리고 전함의 앞갑판과 뒷갑판에는 9문의 16인치 거포가 거치되어 있었는데, 그 거포들의 위용을 보는 순간 나의 뇌리에는 서울 시가지 탈환작전이 개시되기 직전 통영에서 부대를 이끌고 인천항에 도착했던 그날1950년 9월 25일 새벽 팔미도 부근 해상에 포진하여 이따금 온누리를 압살하는 무서운 포성을 내며 포격을 가하고 있던 휘황찬란한 불빛 속에 휩싸여 있는 거대한 전함의 영상이 떠올랐다.

 

  일행이 안내된 회의실을 함정 내부의 실내가 아니라 지상에 있는 호텔내부의 으리으리한 특실처럼 호화롭고 안정감이 있어 보였다.

 

  타원형으로 된 길쭉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미 해군측과 우리 해군․해병대측 참석자들이 둘러 앉자 브리스코 제독은 모닝커피를 한 잔씩 하고 시작을 하자고 하면서 주방에 근무하는 사병을 불러 차 주문을 받게 했다.

 

  한데, 그때 다른 분들은 거의 모두가 커피를 주문한데 반해 유독 나 혼자만은 홍차를 주문했다가 차를 타먹는 방법을 알지 못해 곤욕을 치렀던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내가 곤욕을 치르게 된 이유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엷은 창호지 같은 얄팍한 봉지속에 들어 있는 홍차를 봉지를 찢어서 김이 모락거리는 찻잔 속에 넣어 우러나게 하는 건지, 아니면 딴 방법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내가 왜 홍차를 주문했나 하고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회지무급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혹 나와 같이 홍차를 주문한 사람이 없는가 하고 눈여겨 봤으나 아무도 그런 사람이 있어 처지가 난감해지고 말았는데, 그때 바로 내 옆에 앉아 있던 미군 장교가 커피잔을 들려다 말고 나를 보며 '고우 어헤드'하며 먼저 들라고 권하는 바람에 진퇴유곡에 빠지게 되었다.

 

  나는 그만 엣다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윗쪽 한 귀퉁이에 가느다란 실이 발린 그 봉지를 뜯어 그 속에 든 차를 찻잔속에 부은 다음 티 스푼으로 설탕 그릇속에 담긴 흰 설탕을 서너 숟가락 떠 넣고 조심스럽게 잘 저어서 마셨더니 차 찌꺼기가 목구멍으로도 넘어가고 입술에도 묻는 바람에 창피스런 느낌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한데, 바로 그때 나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브리스코 사령관이 웨이터를 불러 귀엣말로 무슨 말을 하는 것을 눈치채고 있던 나는 잠시 후 웨이터가 가지고 온 홍차를 브리스코 사령관이 찻잔에 타서 마시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방법을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 방법은 간단했다. 웨이터가 찻잔과 예의 그 봉지속에 담긴 홍차와 티스푼 등을 접시에 받쳐 들고오자 사령관은 그 봉지에 달려있는 실 끄트머리를 잡고 그 봉지를 찻잔속에 집어 넣더니만 스푼을 가지고 여러 차례 그 봉지를 짓눌러 김이 나고 있는 찻잔속의 물이 빨갛게 우러 나오게 했다.

 

  그런 다음에 그는 그 봉지를 집어 내어 접시 위에 내려다 놓곤 스푼을 가지고 설탕 그릇속에 담긴 흰 설탕 두 숟가락을 타 넣어 잠시 휘젓더니만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나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 잔을 들고마시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창피스러움을 속으로 삭이고 있었다. 나에게 홍차를 타 마시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한 브리스코 사령관의 순수한 마음씨나 매너에 대해서는 감사한 마음을 느끼면서도 내 자신의 자격지심 때문인지 행여 후진국 장교라고 해서 멸시를 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그날 내가 경험했던 그러한 장면은 먼 훗날 어떤 코믹한 영화에서도 목격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전함 미조리호의 회의실에서 겪었던 창피스러웠던 첫 일을 회상하며 내심 고소를 금할 길이 없었다.

 

  그날 전함 미조리호 회의실에서 개최된 회의의 안건은 백령도와 여도(麗島)를 비롯한 동·서해의 주요 도서에 병력을 배치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한 안건이란 것을 알게 되었던 나는 1950년 12월 하순 진해에서 해병제1연대가 편성된 직후 1연대를 지휘하여 해주(海州)에 상륙한 준비를 갖추라고 했다가 취소가 되고 말았던 일을 머리속에 떠올리며 결국 취소된 명령 대신 이러한 계획을 추진하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동·서해지구의 도서에 병력을 배치하는 일은 그해 2월 초순경부터 편성에 착수하여 2월 중순경부터 5월 초순경에 이르는 사이에 이미 추진이 된 일 이었다.

 

  그 시기에 편성이 된 도서부대는 독립 41중대와 42, 43중대였다. 독립42중대가 원산만(元山灣)의 여도(麗島)에 상륙했던 날짜는 2월 14일이었고, 독립 41중대가 교동도(喬洞島)와 백령도(白翎島)를 거쳐 진남포 앞바다에 있는 석도(席島)에 상륙한 날짜는 4월 초에서 5월 7일에 이르는 사이였다. 그리고 독립 43중대가 성진(城津) 앞바다의 양도(洋島)에 상륙했던 날짜는 8월 28일이었다.

 

  따라서 그날 회의를 통해 거론이 되고 또 결정을 보게 된 사항은 동·서해의 해안 봉쇄작전을 보다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 이미 배치해 놓은 3개 독립중대를 흡수 통합하는 보다 강력한 도서부대를 편성하는 일이었다.

 

  그날 회의 벽두에 브리스코 사령관이 해안봉쇄작전의 의외와 도서부대증편과 관련된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었지만 작전상 중대한 의의를 지닌 해안봉쇄작전을 주목적인 해상과 해안 근접지대를 통한 적의 보급 수송활동과 병력 이동을 저지하는 역할 외에 적 병력의 분산 강요와 적에 대한 심리적 군사적인 견제역할 등을 수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한 역활 외에 또 한 가지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그 특별한 목적이란 백령도에 설치되어 있는 미 공군 통제소인 레이더기지를 보호하는 일이었다. 그 당시 백령도에는 북한 지역으로 출격하는 유엔공군기의 비행을 통제하고 유도하는 통제소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레이더기지를 보호하는 일도 중요한 목적중의 하나였다.

 

  특히 오끼나와에 있는 기지에서 출격하고 있던 B-29 중폭격기의 경우는 기상조건이 좋든 나쁘든 간에 일단 백령도 상공에서 작전상의 통제와 유도를 받은 다음 해상 항로로 북상을 했다가 항로를 동쪽으로 꺾어 공격목표에 대한 폭격임무를 수행하고 귀한 할 시에도 역시 해상 항로를 따라 백령도 상공을 거쳐 돌아갔다.

 

  한편 그러한 회의가 있은 후 사령부에서는 김두찬 중령을 도서부대 증편책임자로 임명하여 진해 신병훈련소에 본부를 두고 증편에 착수하도록 했다. 김두찬 중령은 김동하(金東河) 중령과 임무(부연대장)를 교대하고 군수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해병대에서는 1952년 1월 15일 악 2,500명의 인원으로 3개 대대(6·7·8대대)를 편성하여 6대대와 7대대는 서해지구 도서에 배치(그후 서해부대로 개편)하고 8대대(그후 동해부대로 개편됨)는 동해지구 도서에 배치했는데, 부대 증편 후 병력을 상륙시켜 확보했던 동해지구의 도서들은 독립 42중대가 주둔하고 있던 원산만의 여도와 대도(大島), 신도(薪島), 모도(毛島), 사도(砂島), 황토도(黃土島), 웅도(熊島), 양도(독립43중대의 주둔도서) 등이었고, 서해도서는 독립 41중대가 주둔하고 있던 석도(7대대)와 초도(椒島), 백령도(6대대) 및 연평도, 소청도, 대청도 등이었다.

 

그리고 이들 도서부대에 대한 작전상의 통제는 미 해군이 주축이 된 동·서해 봉쇄함대사령부에서 하고 있었고, 도서부대 장병들에 대한 식량과 식수를 비롯한 보급품은 우리 해군에서 직접 담당하고 있었다.

 

  해병대사령부가 부산 용두산으로 이전한 해인 1951년, 해병대에서는 앞에서 언급을 했듯이 많은 작전을 수행했고, 또 발전적인 많은 일들이 이루어졌었다.

 

  특히 부대편성과 관련해서 해병대는 1951년 1월에 완성을 보게 된 해병제1연대를 비롯해서 3개 독립중대, 포병대대, 전차중대, LVT소대, 공병중대 등이 1월 이후 차례로 편성이 되고, 또 11월 초에는 임시 2연대를편성하여 그해 연말 도서부대로 편성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따라서 1951년 한 해 동안 우리 해병대는 그 많은 전투작전을 통해 불패상승의 빛나는 전통의 초석을 더욱 굳건히 다졌고, 또 새로운 부대편성을 통해 전투력 강화를 위한 발전적인 이정표를 세운 고무적인 해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