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15. 용두산 사령부
(5) 도솔산(兜率山) 탈환작전(奪還作戰)
사령부가 용두산으로 이전한 지 10여일이 지난 후 그동안 홍천강 강변에서 전방지대에 대한 수색전을 벌이고 있던 해병제1연대는 5월 말경 소양강을 건너 6월 3일에는 양구군(楊口郡) 남면에 있는 광치리(廣崎里)로이동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작전명령을 수령하게 되었다.
미 해병사단으로부터 받게 된 그 새로운 작명은 그 광치리 북방에 있는 도솔산(兜率山)지구를 공격하라는 명령이었다.
도솔산(△1148)지구는 태백산맥 중 가장 험준한 산악지대로서 당시 그 일대에는 북괴군 5군단 예하의 12사단과 32사단이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공격 개시일은 6월 4일이었고, 미 해병사단에서 정해 놓은 24개의 공격목표를 점령 완료한 날짜는 6월 20일이었다.
17일간의 혈전 끝에 마침내 적이 난공불락을 호언장담하던 작전지역을 점령 완료했다는 소식이 전문을 통해 사령부로 전해졌을 때 모든 국감실 장병들이 마음이 다 그랬었겠지만 특히 신 사령관과 나는 기쁨을 감추지를 못했다. 우리 해병들이 아니고선 그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정말 장한 일을 해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당초 도솔산 지구에 대한 공격임무는 5월 하순경 양구(楊口)를 공격점령한 미 해병사단의 제5연대가 맡았으나 24개 목표중의 8목표 전방의 무명고지 하나를 점령하는데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게 되어 미 해병사단의 병력 조정문제가 대두되어 우리 해병연대에 그 임무를 부여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6월 4일부터 개시했던 도솔산지구 탈환작전은 최초 1주일 간은 주간작전에 의존했으나 사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하는 바람에 11일 새벽부터 위험부담을 무릅쓴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한 끝에 8목표와 9 및 12목표를 연결된 적의 주저항선을 돌파하고 승기(勝機)를 잡기에 이르렀고, 12일까지에는 캔사스선 내에 있는 1목표에서 16목표까지, 13일부터 19일까지에는 베쥐선 내에 있는 17목표에서 24목표까지를 점령하게 되었는데 해발 1148고지의 도솔산은 22목표로 선정되어 있었다.
그 전투기간 중 나는 여느 때처럼 매일 아침 8시 해군본부 작전상황실에서 개최되는 브리핑 시간에 참석하여 사전에 준비해 둔 상황판과 보고자료를 이용해서 그 작전에 대한 상세한 상황보고를 했다. 그리고 해군본부에 협조를 요청하거나 급히 건의할 사항이 있을 때는 그 자리에서 요청하여 지원을 받았는데, 내가 그런 요청이나 건의를 할때마다 손원일 참모총장은 관련부서의 국감실장들에게 만사 제쳐놓고 지원해주라는 지시를 하곤 했다. 손 총장의 그러한 배려는 해병대를 해군의 주전부대(主戰部隊)로 생각하고 끔찍하게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전투가 개시된 후 사령부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일은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 발생하는 전투손실에 대한 병력보충을 지체없이 해내는 일이었고, 쏟아져 내리는 부상자를 진해에 있는 해군병원으로 후송하여 수용하게 하는 일도 다급한 일이었다. 발생한 사상자의 수가 700명을 넘었으니 미루어 그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 전투에는 대부분이 학도병들인 신병6기생들까지 참가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6기 신병들 중에는 신병훈련소를 수료하고 일선으로 출동한지 불과 며칠 사이에 전사자가 되어 진해 장충단 묘지에 묻히거나 부상을 입고 진해 해군병원으로 후송된 자들이 수 없이 많았다.
연일 부상자들이 쇄도하자 해군병원에서는 경화(慶和)국민학교에 병원분동(分棟)을 설치하여 환자들을 분산 수용했고, 그때 사령부에서는 그때까지의 의존해 왔던 지원병만으로는 도저히 많은 전투손실을 충당하기가 어려워 부득불 해군본부에 건의하여 징집한 일반 의무병을 확보할 대책을 강구했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여러 차례 진해로 내려가서 환자들의 수용실태와 신병훈련소의 훈련과정을 점검하기도 했고, 또 장충단 묘지를 둘러 보기도 했다.
한편 도솔산지구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던 해병제1연대는 7월 8일 도솔산을 위협하는 그 북방의 대우산(大愚山-△1179)을 공격했으나 불순한 일기와 강우 등으로 공격이 부진하여 10일까지 공격을 계속하다가 명령에 의해 공격을 중지하고 7월 17일 미 해병사단의 예비대가 되어 휴식과 재정비를 위해 그 방어지역을 미 육군 2사단 38연대에 인계하고 홍천강(洪川江) 상류지대인 철정리(哲定里)의 강변으로 이동하여 약 40일간 휴식과 재정비를 했다.
그리고 작전이 완료된 후 신현준 사령관과 손원일 참모총장은 빛나는 승전을 거둔 1연대 장병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그 멀고도 험한 길을 L-19기와 지프차 등의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다녀왔었다.
신현준 사령관과 손원일 참모총장은 인천상륙작전 때 우리 해병대의 상륙부대가 적색해안에 상륙했던 그날 저녁 보슬비 내리는 그 청승맞은 해안 교두보의 참호속에서 함께 선잠을 잔 분들이었고, 또한 한 분은 대한민국 해군의 창설자로 한 분은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로서 존경을 받고 있는 두 분은 9월 17일 아침 부평(富平)에 있는 나즈막한 야산 위의 미 해병5연대 CP에도 함께 방문을 한 것이 기연(奇緣)이 되어 때마침 그곳을 방문한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용감한 지휘관들이라며 상신한 미국 정부의 은성무공훈장을 북진작전 기간중인 1950년 11월 중의 어느날 각자가 미 10군단에서 제공해 준 경비행기를 타고 함흥(咸興)에 위치하고 있던 미 10군단 사령부로 가서 군단장 알몬드 소장으로부터 함께 받고 돌아간 그러한 분들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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