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15. 용두산 사령부 (4) 海兵隊 심볼마크

머린코341(mc341) 2014. 8. 13. 23:06

국방의 멍에 - 15. 용두산 사령부

 

(4) 海兵隊 심볼마크

 

  1951년 5월 하순경이었다. 참모장으로 부임한 직후 초도순시차 진해 해병학교를 방문했던 나는 해병학교(진해여고) 정문밖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입간판에 그려져 있는 독수리와 별과 닻으로 된 인상같은 마크를 보고 마음이 확 끌렸다.

 

  그런데 현관 안으로 들어서다 보니 현관 입구에 있는 게시판에 공모를 해 놓은 듯한 여러 점의 마크 도안이 있기에 사령부에서 공모를 해야할 해병대 마크를 해병학교에서 모집을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유심히 눈여겨 보았다.

 

  그리고선 도안을 가운데 교문 밖 입간판에 그려져 있는 그 원 도안이 가장 마음에 들기에 학교장 윤영준(尹永俊) 중령에게 그것을 떼어 달라고 하여 사령부로 가져가서 해병대의 마크로 채택하는 문제를 사령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검토한 끝에 결국 그 해 가을 해병학교에서 지급키로 돼있는 20만환의 상금을 사령부에서 지급키로 하고 그 도안을 해병대의 심볼마크로 채택하게 되었는데, 군수국장 김윤근(金潤根) 중령이 그 도안을 해군본부로 가지고 가서 손원일 총장에게 보여 드리며 해병대 마크로 선정된 도안이라고 하자 손 층장은 '그것 참 멋이 있군'하면서 '우리 해군 마크도 그렇게 만들어야겠다'는 말을 했다고 했다.

 

  그때까지 우리 해병대에는 1949년 8월 하순경 진주에 1개 대대 규모의 전투부대를 파견할 때 신현준 사령관이 고안했던 X자 형으로 세운 두자루의 총대 중심부에 해군의 마크인 닻을 고착시켜 놓은 마크가 있어 장병들이 드물게 지니고 있던 철모 앞 부위에 흰 페인트나 검은 색깔로 그려 놓곤 했었다.

 

  그런데 신현준 사령관이 해군과 해병대를 구별하고 해군의 육전부대라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고안했던 마크가 장병들의 군복에 찍히게 된 시기는 1950년 9월초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제주도로부터 부산항에 도착했던 해병제1연대 장병들이 그때까지 입고 있던 낡아빠진 훈련복을 벗어 버리고 해군에서 공급해준 신품 전투복인 미육군의 기성복으로 갈아입을 때 부산항에서 처음 대면하게 된 미해병대 장병들의 회색 전투복 윗저고리 왼쪽 가슴부위에 적혀 있는 미해병대 마크와 그 마크 밑에 함께 적혀 있는 USMC라는 글자를 눈여겨 본 연대본부 참모장교들이 신 사령관이 고안해 그 마크 밑에 '해병대'라는 글자를 넣은 철형(鐵型)을제작하여 신품 전투복 왼쪽 가슴부위에 검정색 스템프 잉크를 묻혀 찍은 바로 그 때였다.

 

  그런데 진해에서 그 마크를 처음 대하게 되었을 때도 그런 느낌을 가졌었고, 또 채택과정에서도 누군가가 육군을 상징하는 별 위에 앉아 있는 독수리의 불안정성을 지적한 바 있었으나 그때 나는 마치 해병대의 존재성을 상징하는 것과 같은 그 불안정성은 독수리의 용맹성에 의해 극복이 될 것이라 생각을 했었다.

 

  그 마크를 고안했던 사람은 당시 해병학교 교재과에 근무하며 교관들의 차드를 작성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던 이흥주(李興周)라고 하는 신병6기 대원이었는데, 인천중학교 5학년생이었던 그는 휴전 후 복교과정을 거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서양학과)을 졸업하고 생활미술계에서 활약을 하고 있다.

 

  한편 그 도안을 해병대의 상징마크로 채택하게 되자 사령부에서는 그 마크를 사용할 궁리를 했다. 우선 전투복이나 근무복 윗저고리 양쪽 깃에 달 작은 마크와 모자에 달 큼직한 마크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했고, 또 그 마크를 달 장교들의 정복과 근무복 등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말하자면 그 전까지는 해군의 정복을 입고 있었으나 마크가 탄생된 그 시기를 기해 우리 해병대의 정복과 근무복을 별도로 만들어야겠다는 구상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령부에서는 군수국장 김윤근 중령의 주관하에 그 해 1951년 가을부터 옷깃에 달 앙증맞은 작은 마크를 대량으로 제작하여 예하부대에 내려 보내기 시작했고, 또 그 해 11월 통제부 참모장으로 있던 김석범(金錫範) 준장이 해병대 부사령관으로 취임한 후에는 장교와 하사관의 정복과 정모 및 근무복 등을 제작할 계획을 추진했는데 그 이듬해 제일먼저 제작한 것이 군함색(회색) 정복이었다.

 

  그러나 최초로 만들어졌던 군함색 정복과 코트는 질이 좋지 못한 국산천인데다 색상이 무겁고 우중충하여 2~3년 후 미 해병대의 근무복 색상인 독특하고 매력적인 초록색 천으로 두번째 정복을 만들게 되었고, 또 내가 사령관으로 취임했던 1960년도에는 현채 착용하고 있는 정복으로 바꾸는 등의 변천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마크가 채택된 후 사령부에서는 해병대의 군기(軍旗)도 만들게 되었는데, 그 군기를 만들 때는 신 사령관의 뜻에 따라 가느다란 흰천,'정의와 자유를 위하여'라는 구호를 적어 넣어 그것을 독수리의 목에 매달아 나부끼게 했다. 그러한 구상은 창의적인 것이 아니라 독수리와 지구와 닻으로 된 미 해병대 기(旗)의 독수리 목에 나부끼는 대님같은 흰천에 적혀 있는 'Samper Fidelis (샘퍼 휘이댈리스:항상 충실하자)'라는 구호를 본 딴 것이었다. 그 구호는 성경에도 나오는 어귀이다.

 

  또한 신 사령관은 그 기의 바탕색깔을 정할 때 싱싱함과 성장(成長)을 상징하는 빛깔이라고 해서 초록색을 택하였고, 기를 만들 때 해병대 마크와 기폭의 가장자리를 굵직한 금실로 요란하게 수를 놓게 했다.

 

  또한 그 기는 여러 개를 만들어 사령관실과 전투단장실, 해병학교 교장실을 비롯한 주요부대의 부대장실에 하나씩 보관해 두게 했는데 그 후 녹색 바탕으로 된 군기는 내가 사령관으로 취임한 뒤 빨간 바탕색깔로 변경되고 기의 무게도 훨씬 가볍게 만들었다.

 

  초록색 빛깔을 발간 빛깔로 변경했던 까닭은 그해 이미 우리 해병대에서 선호하기 시작했던 땀과 피와 승리를 상징하는 새노란 황색과 적색을 이른바 우리 해병대의 색깔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고, 무게를 가볍게 했던 연유는 어느 해의 국군의 날 행사 때 보니 타군 기수(旗手)들이 들고 행진하는 군기의 깃발을 보니 천이 너무 두텁고 무거워 바람이 불어도 기폭이 펴지지 않고 축 늘어진 채 둘둘 말려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끝으로 1964년 진해 덕산비행장 동네산(△43)에 해병대의 발상탑을 건립할 때 해병대에서는 탑신 상층부에 1951년 여름철에 제정했던 오늘날의 마크를 주조해서 놓어 놓지 않고 1949년 8월에 고안했던 그 최초의 마크를 주조하여 올려 놓음으로써 그 역사성을 더욱 길게 했는데, 탑신 위의 그 마크에는 두 개의 월계수 잎사귀가 장식되어 해병사(海兵史)의 영광을 기리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