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16. 재출진(再出陳) (1) 해병교육단(海兵敎育團)

머린코341(mc341) 2014. 8. 14. 21:57

국방의 멍에 - 16. 재출진(再出陳)

 

(1) 해병교육단(海兵敎育團)

 

  1952년 3월 중순경이었다. 나는 바로 그 무렵에 편성명령이 내린 해병교육단장으로 발령을 받고 진해로 내려갔다.

 

  사령부에서 해병교육단을 편성할 계획에 착수했던 시기는 이미 연급한 바 있듯이 1951년 12월 하순경이었다.

 

  계획에 착수하기 전 나는 사령부 수석고문으로부터 콴티코(Quantico)에 있는 미 해병교육단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하면서 수석고문은 한국에도 콴티코의 교육단과 같은 교육기지를 창설하기를 바란다고 했고, 또 만약에 한국해병대에서 교육단을 창설하게 된다면 고문단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하겠다는 말도 했다.

 

  그때 수석고문으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콴티코의 미 해병교육단에는 기초반 과정과 초등군사반, 고등군사반 등 동해안의 캠프 레쥰에 있는 미 해병대의 신병훈련소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군사교육기관이 집결되어 있다고 했는데, 그러한 일이 있은 후 사령부에서는 우선 신병훈련소와 해병학교를 기간으로 교육단을 편성할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고, 교욱단 편성 후의 발전계획도 모색을 했다. 그 당시 신병훈련소는 경화동에 있는 구 일본군 육전대의 병사(兵舍)와 연병장을 사용하고 있었고 해병학교는 진해여고 교사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육단 편성계획을 세울 때 사령부나 해군본부에서는 신병훈련소 연병장 바로 그 동쪽에 접해 있는 제사공장(製絲工場)의 기계와 내부시설물을 다른 곳으로 이전시킨 다음 그 제사공장의 건물을 개수하여 해병학교로 이용한다는 전제를 두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 공장 소유주의 공장 이전 반대로 그 계획은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되고 말았다.

 

  정부 당국에서 공장이전에 필요한 부지를 마련해 주는 등 공장 소유주와 절충을 하게 되면 무난히 해결될 것으로 믿고 그러한 계획을 세웠던 사령부로서는 초장부터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사공장의소유자는 부산일보 사장직과 국회의원직을 보유하고 있던 언론계와 재계 및 정계에까지 지명도가 높은 김지태(金智泰)씨였다.

 

  한편 진해로 오게 된 나는 원일봉(元一峰) 기슭의 밭뙈기에 몇 동의 야전천막을 가설해 놓고 교육단 본부의 편성에 착수했는데 내가 추진했던 1차적인 작업은 교육단 본부를 구성하는 일과 교육단 본부를 신병훈련소 병사로 사용하고 있는 구 일본 해군육전대의 낡은 2층 목조건물로 이전시키기 위해 추진해야 했던 천막으로 된 신병훈련소의 병사를 연병장 일각에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때 이미 사령부에서는 교육단 건설중대를 편성하여 교육단 창설을 추진하도록 했는데 장익삼 소위가 지휘하는 건설중대는 처음에는 제사공장 남쪽 해변가에 있는 선착장(船着場) 부근 훈련소의 연병장과 제사공장의 경계지대에 가설되어 있는 철조망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가 연병장남쪽 해변가에 일대에 가설된 훈련소의 천막 병사 가설작업이 끝난 뒤에는 훗날 진해시의 공설운동장이 건설된 곳으로 이전을 했고, 훈련소 연병장과 제사공장 경계지대에는 뽕나무밭도 있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해병교육단 본부가 편성된 날짜는 그 해 8월 15일이었다. 그날을 기해 원일봉 기습의 밭뙈기에 진을 치고 있던 단 본부의 임시 천막촌은 철거되고 교육단 본부는 신병훈련소가 들어서 있던 구 일본군 육전대의 병사건물로 이전했다.

 

  한편 교육단 본부가 편성된 후 나는 해병학교를 이전시킬 제사공장 철거문제가 하루속히 해결되기를 학수고대하며 실현된 단 본부의 기능 강화를 도모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특히 나는 신병들이 사격훈련을 하는 총소리 때문에 단 본부 장병들이 사무를 볼 수가 없어 하루속히 단지 내에 있는 사격장을 어디론가 옮겨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당시 신병훈련소에서는 제대로 된 사격장을 갖지 못해 연병장 서쪽편, 그러니까 그 후 보급정비단이 들어선 그 서쪽 야산 기습에 여나무개의 표적을 세워놓고 사격연습을 하고 있었으므로 진종일 볶아대는 총성 때문에 훈련소와 교육단 본부에서는 제대로 일을 볼 수가 있는 실정이었고 그렇다고 해서 가뜩이나 단기교육을 받고 있던 신병들의 사격훈련 시간을 단축시킬 수도 없는 일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