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16. 재출진(再出陳) (15) 캠프 인디언 힐

머린코341(mc341) 2014. 8. 16. 19:51

국방의 멍에 - 16. 재출진(再出陳)

 

(15) 캠프 인디언 힐

 

  사천강 전초지대에 대한 중공군의 제2차 추기공세가 실패로 끝난 후 그들은 두 번 다시 대규모의 공세를 취하지를 않았다.

 

  따라서 사천강 전초지대에서는 그 후 소단위부대에 의한 기습전과 정찰전이 간혹 벌어졌을 따름이었다.

 

  한데 그러던 어느날 나는 사단장의 특명으로 1개 중대의 공격부대를 차출하여 미 해병사단의 지원하에 사천강 건너편 쪽에 있는 중공군의 일부주저항선(우일선 대대 정면) 진지에 대한 여명의 기습작전을 감행했는데, 중공군의 방어태세를 테스트하기 위해 계획했던 기습작전의 결과는 이상하게도 무반응 바로 그것이었다.

 

  전투단 포병대대와 미 해병사단의 155밀리포의 대대적인 지원사격과 미 해병대의 콜세아 전폭기의 지원하에 도섭이 가능한 강을 건너 적진으로 뛰어든 공격소대 장병들이 마구 벙커를 부수고 난장판을 벌였으나 어떻게 된 영문이지 적이 배치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주진지는 무덤같이 텅 비어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유리한 감제고지에서 아군의 작전을 시종 지켜보고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포가 굳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니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그날 폴락 소장과 나는 우일선 대대의 주저항선 우단 155고지에 구축되어 있는 전투단의 OP에서 시종 작전을 관망하고 있었는데, 정면의 중공군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는데 대해 사단장과 나는 의아스러운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특히 그들의 포가 어디고 행방을 감춰버렀는지 아니면 아군의 대(對) 포병사격이 두려워서 꼼짝을 하지 않고 있었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사천강 전초지대의 상황이 그처럼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또한 휴전협상이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던 1953년 5월초 나는 미해병사단장으로부터 부대이동 명령을 받고 5월 7일 기해 사천강 전초진지 및 주저항선을 미 육군 25사단 27연대에 인계하고 연천군(漣川郡) 청산면 상대전리에 있는 미 1군단의 예비진지(캠프 인디언힐)로 이동했다.

 

  전투단의 부대이동은 미 해병사단이 미 1군단의 예비대가 되어 미 육군 25사단과 임무를 교체하는 휴식과 재정비를 위해 동두천(東豆川) 지역으로 이동하게 됨에 따른 것이었다.

 

  그때 우리 전투단과 임무를 교대했던 미 25사단 27연대는 과거(1950년 8월) 진동리(鎭東里) 지구에서 함께 작전을 했던 부대였으므로 나로서는 남다른 감회가 없지 않았다.

 

  그리고 나 자신이 전투단장으로 취임한 지는 불과 6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우리 전투단과 미 해병사단이 중동부전선으로부터 장단지구전선으로 전전(轉戰)한 지는 그때 이미 1년 2개월이라는 세월이 경과된 후였다.

 

  그러므로 정말 오랜만에 후방으로 빠지게 된 장병들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홀가분했다. 앞에서도 언급을 했듯이 오른쪽(北)은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판문점, 정면(西)은 사천강, 좌측방(南)과 후방(東)은 임진강으로 둘러싸여 있는 특수한 작전지역, 더구나 적진으로부터 철저히 감제당한 평지나 다를 바 없는 사천강 전초지대에서 마치 두더지 족속처럼 땅굴속에 칩거(蟄居)하며 2차에 걸친 중공군의 대공세와 수없이 많은 기습전을 치러야만 했던 해병들로서는 전초지대가 신임소위들이 말했듯이 마치 황천길 대기소와 같은 곳이었으므로 그곳을 떠나게 된 그들의 심정이란 너무나 홀가분할 수밖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단지구 전선을 떠나던 발 나는 남다른 감회를 느끼고 있었다. 그 당시의 나로서는 우리 전투단이 배속된 미 해병사단이 미 1군단의 예비대가 되어 동두천과 연천지구로 이동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예비사단으로 있다가 장차 어느 곳에 배치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는 일이었으므로 그 동안 내가 작전을 지휘해 왔던 사천강 전초지대, 특히 10월 31일 그 휘엉청 달밝은 밤에 우리 해병들이 무수한 중공군의 시신을 뒹굴게 했고, 또 갈대 우거진 황량한 들판에 '나가자 해병대'의 노래소리를 울려퍼지게 했던 피비린내 나는 작전지역에 대한 석별의 정을 금할 길 없었다.

 

  그리고 그 작전지역에서 용감하게 잘 싸워 준 모든 장병들과 애석하게도 작전지역에서 전몰하거나 부상을 입고 후송된 장병들에 대한 감사의 느낌과 추도와 위로의 느낌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 부대가 상대전리로 이동 완료한 후 나는 미 해병사단의 명령에 따라 포병대대와 전차중대로 하여금 전방지대에서 작전중에 있는 육군(한국군) 1사단을 지원하도록 했는데, 그 직전까지는 미 육군의 화력지원부대가 1사단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비대로 있는 동안 전투단 본부에선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단체외출계획을 세워 각 대대별로 교대로 실시하도록 했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 단본부에서는 목적지인 서울까지 매일 일정한 대수의 트럭을 운행했고, 인솔장교의 인솔하에 출발한 외출자들은 일단 서울 역전의 양동에 설치해 놓은 연락사무소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하차하여 오후 5시까지 자유시간을 가진 후 다시 그곳에 집결하여 부대로 돌아오곤 했다.

 

  외출한 대원들이 찾아갔던 곳은 고향이 서울이나 경기지구인 사람들은 고향이나 일가친척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대원들은 극장이나 고궁 등을 찾아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