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16. 재출진(再出陳)
(16) 연천지구전투(漣川地區戰鬪)
전투손실에 대한 병력보충과 교육 훈련 및 단체외출과 휴식 등으로 부대의 사기진작과 재출동에 대비한 전투력을 정비하고 있던 전투단은 6월27일 오후 2시경 명령에 따라 연천지구에서 작전중에 있는 한국군 1사단(미 1군단에 배속)에 작전상 배속되어 1사단 11연대의 진지를 인수 방어하게 되었다.
내가 직접 수령했던 최초의 명령은 미 1군단장 클라크(Bruce C. Clark) 소장으로부터 받은 구두명령이었다.
그날 오전 10시경이었다. 내가 위치한 CP 전방 약 100미터 지점에 있는 지대가 약간 높은 헬기착륙장에 빨간 별판이 붙은 헬기 한 대가 불시에 착륙하는 것을 본 나는, 필시 군단사령부에서 누군가가 방문을 하는구나 생각하고 헬기착륙장으로 걸어갔더니 생각했던 대로 헬기에서 내리고 있는 사람은 미 1군단장 클라크 소장이었다.
그때 착륙장에는 전투단 수석고문도 모습을 나타냈는데, 나와 수석고문을 대면하기가 바쁘게 군단장은 새파랗게 질려있는 듯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했다.
즉, 지금 1사단 전방 CP에서 오는 길인데 전방 CP에서 브리핑을 받고있던 중 적의 포탄이 집중되어 하마터면 큰 변을 당할 뻔 했다고 말한 다음 상황이 급하니 전투단장 김 대령은 즉시 병력을 출동시켜 1시단 11연대의 진지를 인수할 준비를 갖추도록 하라고 했고, 또 정식명령은 곧 미 해병사단으로부터 하달될 것이라고 했다.
졸지에 그와 같은 명령을 받게 된 나는 그 길로 예하 각 대대에 출동준비를 갖추도록 지시한 다음 용전리(龍田里)에 있는 1사단 본부로 가서 사단장 김동빈(金東斌) 준장에게 배속신고를 하고 징파리(澄波里)에 있는 11연대 본부로 가서 11연대장 최주종(崔周鍾) 대령을 만나 부대교대에 따르는 제반업무를 협의했다.
당시 미 1군단의 중앙우익사단이었던 1사단의 방어지역은 '퀸 고지'와 '박 고지' 등을 전초에 둔 임진강 동안(東岸) 일대와 그 서안 일대였다.
그리고 임진강 동안에 그어진 전투지경선을 사이에 두고 동·서 양측방으로 펼쳐진 1사단의 주저항선 가운데 11연대가 배치된 곳은 좌일선 쪽이었고, 15연대가 배치된 곳은 박 고지와 퀸 고지가 있는 우일선 쪽이었다.
250고지인 퀸 고지와 199고지인 박 고지 등은 원래 중공군이 구축해 놓은 전초진지들이었으나 네덜란드군 대대와 프랑스군 대대가 배속된 미2사단에 의해 피탈당함으로써 아군의 전초진지로 확보되고 있었으나 6월25일을 기해 취해졌던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인해 전초진지들이 다시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1사단에서는 예비대인 12연대를 중앙1선에 투입하여 15연대의 좌일선 대대 정면에 있는 박 고지를 공격하게 하고 15연대로 하여금 우일선 대대 정면의 퀸 고지를 공격하게 했으나 모두가 실패하게 됨에 따라 미 1군단장은 11연대를 예비대로 전환시켜 퀸 고지 탈환작전에 투입키로 결심하고 해병 제1전투단으로 하여금11연대의 방어진지를 일시적으로 인수 방어케 한 것이었다.
11연대와의 진지교대는 그날 오후 4시경부터 자정무렵까지 이루어졌는데, 부대이동에 필요한 차량은 미 해병사단 수송대대로부터 지원되었다.
11연대와 임무를 교대할 때 나는 1대대를 우일선에 전개시켜 11연대 1대대와 임무를 교대하게 하고, 2대대를 좌일선에 전개시켜 11연대 3대대와 그리고 예비대인 5대대는 11연대의 예비대인 2대대와 임무를 교대하게 했다.
한편 11연대와 임무를 교대하기 전 11연대의 작전지역을 시찰했던 나는 좌일선쪽에 있는 주진지(2대대 6중대가 배치된 곳) 전방에 있던 전초진지(△128)와 1대대 3중대가 배치된 전초진지 및 2대대 7중대가 배치된 전초진지 등이 적 진지의 전사면에 위치하여 방어에 매우 불리한 상황이란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나는 사천강 전초지대에서 설치 운영했던 청음초를 전초진지전방에 설치하여 적의 접근은 조기에 발견하여 탄막사격으로 강타하게 하고, 또 강력한 정찰대의 운용으로 전초진지와 주진지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 진지가 아군의 방어진지보다 높은 지대에 있고 보니 특히 야간의 경우 높은 지대로부터 내려오는 적을 쌍안경을 가지고 있는 청음초의 초병들이 밤하늘을 배경으로 쉽게 발견할 수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편 11연대 본부가 위치하고 있던 증파리의 전투단 본부와 전투단의 좌·우일선 대대 본부에는 미 해병사단에서 파견한 포병연락장교 외에 1사단 좌인접 부대(우인접 부대는 미 육군 7사단)인 영연방(英聯邦) 사단에서 파견한 포병연락장교가 배치되어 있어 어딘지 모르게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영연방사단(Common Wealth Division)으로 통칭되고 있던 그들의 방어진지 정면에서는 그간 별다른 접적활동(接敵活動)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홍콩(香港) 문제와 영국과 중공간의 무역 거래문제 등으로 은밀한 묵계가 이루어져 적어도 양국군 간엔 이미 휴전이 성립된거나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 암암리에 전파되고 있었으므로 나의 생각으로는 미 8군으로부터 보급받은 포탄을 소모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전투단을 위해 적극적인 지원사격을 해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25동란 때 영국은 홍콩에 기지를 둔 극동함대에서 2척의 구축함과 3척의 프리깃함을 서해안으로 급파(6. 29)하는 한편 호주·뉴질랜드·캐나다 등 영연방 국가의 파병을 지원했고, 또 애당초 고려하지 않고 있던 지상군의 파병도 실현시켰다.
영국이 파병했던 지상군은 홍콩 주둔 제40보병사단에서 차출한 27여단본부와 그 예하의 2개 대대병력 그리고 영국 본토로부터 파한한 29보병여단 등 2개 여단병력이었다.
그런데 지상군 병력 가운데 1950년 8월 하순경 부산에 도착했던 27여단을 중공군의 1차 추기공세 때인 1951년 4월 하순경 호주·캐나다군 대대와 뉴질랜드군 포병대대를 통합지휘하여 화천군 사북면 사창리지구에서 붕괴된 한국군 6사단을 밀고 내려온 중공군의 주공부대(主攻部隊)를 가평천(加平川) 골짜기에서 격파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바 있었고, 1950년 11월 중순경에 부산항에 도착했던 29여단은 중공군의 제1차 춘기공세 때 파주군 적성면 설마리(雪馬里)의 강변 고지에서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받아 1개 대대의 병력이 거의 전멸을 당하는 기록을 남겼으나 1951년 7월 28일 파주군 적성면에서 영연방 통합사단으로 발족된 후로는 임진강 북안(北岸) 일대에 대한 정찰전을 수행하다가 1951년 말경 그 북방의 고왕산(△355)과 마량산(△317) 등을 공격 점령한 후 이른바 '제임스타운' 선으로 진출한 뒤 당시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날밤 전초진지의 진지교대가 완료된 시각은 밤 10시경이었다. 운이 좋게도 그 시각까지 뿐 아니라 그 다음날 날이 밝을 때까지 별다른 상황이 없었던 것이 나로서는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만약에 낮이 익지도 않은 남의 진지에서 적의 기습공격을 받기라도 했더라면 그만큼 작전에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적의 공격이 있었던 날은 그 다음날인 28일이었다. 적이 공격을 개시했던 시각은 밤 9시경이었고, 공격을 받은 진지는 우일선 대대인 1대대 1중대의 주진지였다.
그 시각을 기해 각종 지원포의 맹렬한 지원사격하에 약 2개 중대의 적이 공격을 해오자 1중대 장병들은 익숙치 못한 진지에서 용감히 맞서 싸웠으나 철조망과 교통호가 무수한 적 포탄의 낙하로 묵사발이 되는 바람에 마침내는 진내전으로 뒤엉켜 0시 30분경까지 처절한 백병전을 벌인 끝에 가까스로 적을 격퇴시킬 수가 있었다.
적이 공격을 개시했을 때 나는 전투단 포병대대와 미 해병사단의 포병연대 그리고 영연방사단의 포를 최대한 동원하여 적의 예상접근로를 맹타한 끝에 적 공격부대에도 큰 타격을 주었지만 특히 적 후속부대를 차단하는데 큰 위력을 발휘하게 했다.
지금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만약에 그날밤 적의 후속부대를 차단하지 못했더라면 1중대의 진지를 고수하기가 어려웠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한편 그 이튿날 아침 나는 지프차를 타고 격전을 치른 1중대 진지를 시찰했는데, 개활지와 작은 도랑을 건너가는 동안 적 포진지의 표적이 되어 한 두 차례 포격을 받았으나 다행히도 피해는 입지 않았다.
나지막한 고지에 구축된 1중대 진지에 도착해 보니 그 동안 얼마나 많은 포탄세례를 받았던지 그 고지는 털이 죄다 뽑혀지고 없는 새 대가리같았고, 진지 안팎에는 수많은 시체가 뒤엉켜 있었다. 피로에 지친 몸으로 나를 맞이해 준 1중대장 엄상록 중위는 얼핏 보기엔 안색이 사색(死色)을 띠고 있는 듯 했으나 그는 삭발(削髮) 중대장이라는 별명을 지닌 용감한 중대장이었다.
그가 그런 별명을 지니게 된 연유는 1952년 12월 초 대대장 김종식 소령의 꾸중을 듣고 중대장 이하 전 대원이 머리를 빡빡 깎고 기습전을 수행한 끝에 3명의 포로를 획득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중대 진지를 시찰한 나는 1중대의 피해가 적지 않아 예비중대와 진지교대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부대본부로 돌아왔다.
해병전투단이 1사단 11연대 진지를 방어했던 기간은 약 10일간이었는데 그 기간중 29일 밤에는 적이 2대대 7중대의 전초진지(△128)를 공격했으나 격퇴를 당하였고, 7월 3일에는 적이 2대대 6중대의 전초진지를 공격하여 진내전이 벌어진 상황에서 적 후속부대의 출현으로 부득불 진지를 적의 수중에 넘겨주고 말았으나 역습대를 투입하여 기어코 적을 격퇴시키고 말았다.
그 기간 중 나는 각 대대 장병들이 용전분투하는 가운데 청음초와 수색정찰대 등을 적절히 운용하고, 또 우군포의 지원을 최대한 받게 됨으로써 우군진지를 무사히 지켜 주고 작전지역에 대한 지휘권을 되돌려 줄 수 있었다.
7월 8일 육군 11연대에 진지를 인계해 준 우리 전투단은 상대전의 캠프 인디언힐로 이동, 집결해 있다가 7월 12일 미 육군 25사단 27연대에 인계해 두고 왔던 사천강 전초지대로 복귀했다.
참고로 15연대의 전초진지인 퀸 고지를 공격했던 11연대의 작전결과를 간략하게 언급해 둔다. 그날(29일) 오전 10시를 기해 개시했던 퀸 고지에 대한 11연대의 공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일진일퇴를 거듭하자 미 1군단장은 용전리의 1사단 본부를 방문하여 사단장 김동빈 준장에게 전초진지들에 대한 탈환작전을 포기하고 주저항선을 강화하는데 주력하게 함에 따라 결국 그 두 개의 전초진지는 휴전이 될 때까지 적의 수중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미 1군단의 예비대로 있던 미 해병사단과 전투단이 다른 작전지역에 투입되지 않고 1년 2개월간 방어해 왔었던 장단지구로 복귀하기 직전에 나는 사령부의 인사명령에 따라 7월 7일 고길훈 대령에게 지휘권을 인계하고 해병교육단장으로 복귀했다. 인사발령을 받고 보니 나는 다시 한 번 장단지구 전선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과 불과 며칠간이긴 했지마는 그 동안 우군부대의 진지를 이상없이 지켜주고 돌려주게 된 일들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 나와 작별을 고하게 된 전투단 장병들에게 대한 석별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고, 또 그들의 무운을 빌기도 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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