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17. 휴전후 해병교육단(海兵敎育團)
(1) 해병학교(海兵學校)의 이전(移轉)
휴전을 불과 20일 앞둔 7월 7일부로 해병 제1전투단장직을 하직하고 다시금 해병교육단장으로 부임했던 나는 그로부터 2년 3개월간 그 직위에 재임하면서 휴전 후의 강병육성과 해병대의 기본임무인 상륙전의 수행능력 양성을 기본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필요한 교육과 훈련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그리고 교육단장으로 부임한 지 2개월 후인 9월 1일부로 나는 대령계급에서 준장으로 승진했다. 장군으로 승진한 나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는 한편 나라와 겨레를 위해 더욱 분발하고 헌신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교육단장으로 복귀했을 때도 제사공장 철거문제는 여전히 해결이 되지 않고 있었으나 다행히도 그 문제는 이승만 대통령에게까지 보고가 되어 대통령의 지시로 상공부와 국방부에서 직접 개입하여 공장주측과 연석회의를 가진 끝에 제사공장의 부지와 건물을 해병대에 양도하는 대신 경남 밀양(密陽)에 넉넉한 공장부지를 마련해 주고 그곳에 공장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정부 당국에서 지원을 해 주는 조건으로 마침내 그 난문제를 해결하기에 이르렀는데, 1953년 9월 중순경 진해 읍사무소에서 연석회의가 열렸을 때 나 자신도 그 회의에 참석했었다.
이 대목에서 특별히 부연해 두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곧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 있었지만 해병교육단의 창설을 위해 애써 준 미 해병 고문단의 정성어린 노력과 관련된 것이다.
내가 교육단장으로 복귀했을 당시 사령부 수석고문으로 있던 포니 대령은 과거 미 10군단 참모장으로 있을 때 고성(高城)지구에 주둔하고 있던 우리 해병대의 지휘소에도 한 두 차례 방문한 적이 있는 구면이었는데, 사령부 수석고문으로 부임한 후 그는 진해에 콴티코의 미 해병대 교육단 보다 더 규모가 크고 멋진 KMC의 교육단을 건설할 것을 건의했을 뿐 아니라 제사공장 철거문제가 난문제로 등장이 되자 수석고문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부터 미국 해병대를 신병시(神兵視)하고 있었고, 한국전에 투입된 미 해병 1사단과 한국 해병대를 지극히 신뢰하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방문하여 그 문제 해결을 위한 건의를 하는 등 해병교육단의 창설과 해병대의 발전을 위해 큰 기여를 했던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1953년 10월 중순경 부사령관으로 있던 김석범 소장이 제2대 사령관으로 발령을 받을 즈음 수석고문은 한국 해병대의 위상(位相)을 격상시키고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그때까지 TO가 소장으로 되어있던 해병대사령관의 계급을 중장으로 끌어올렸던 것도 그 당시의 수석고문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하여 실현시킨 일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한 건의를 할 때 수석고문은 미국 해병대사령관의 계급과 미 해군참모총장의 계급이 같은 대장이라는 점을 내세웠다고 하지만, 법률상(海兵隊令) 해군참모총장에 예속되어 있는 해병대사령관의 계급을 해군참모총장의 계급과 동일한 계급으로 끌어올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만든 것처럼 놀라운 일이었다.
한편 제사공장 철거문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후 공장 건물 내에 설비되어 있는 각종 기계시설이 철거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던 교육단본부에서는 철거작업이 끝나는 즉시 여러 개 동의 공장건물을 보수하고 단장하여 그 때까지 진해여고에 위치하고 있던 해병학교를 새로운 전당으로 이전시키게 되었다.
1950년 12월 1일 편성을 보게 된 해병학교는 처음에는 도천국민학교에 위치하고 있다가 1951년 초에 진해여고로 이전한 후 동래(東萊)에 있는 육군종합학교를 수료한 해간(海幹) 3, 4, 5, 6기생들 가운데 성적이 우수한자들을 교관요원으로 확보하는 가운데 여러개 기(期)의 특과사관후보생들과 해간 7기부터 17기까지를 직접 교육하여 배출시켰는데, 진해여고에 있던 해병학교가 교육단 단지 내로 이전할 당시 진해여고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해간기수(期數)는 1954년 4월에 입교했던 18기생들과 그들보다 3개월 후에 입교했던 19기생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진해여고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가 개수된 옛 제사공장건물로 보따리를 싸가지고 이사를 한 셈이었는데, 18기생들이 새로운 전당에서 임관식(수료식)을 거행했던 날짜는 1955년 1월 15일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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