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명인·기인

군사(軍事) - 국방대학원 교수 역임한 이원경 대령

머린코341(mc341) 2014. 8. 16. 20:04

군사(軍事) - 국방대학원 교수 역임한 이원경 대령

 

해간1기 출신으로 66년 8월부터 67년 7월까지 약 1년 간 국방대학원에서 교수로 근무한 데 이어 해병지휘참모대학의 초대 부총장을 역임한 바 있는 이원경(李元坰) 전 예비역 대령은 특히 해병대의 창설기에 확보된 해병1기 신병들의 육성과 해병대의 제주도 주둔기에 수행한 한라산의 공비토벌 및 6.25전쟁기를 통해 전설적인 많은 화제를 남긴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전북 남원출신((1926년생)으로 일찍이 일본 요꼬스까 해군종합학교를 졸업한 후 8.15 해방 직전까지 일본군에서 복무했던 그는 대한민국 정부수립(48년) 1년 후인 49년 1월 뜻을 같이하는 10여명의 일군 경력자들과 함께 해군항해학교 특수반 과정을 이수한 다음 하사의 계급으로 그해 4월 15일에 창설된 창설기의 분대장급 기간요원으로 해병1기생들의 교육 훈련에 전념했던 그는 그해 7월 해간1기 전형시험에 합격하여 태능에 소재한 육군사관학교에서 육사9기생들과 같이 6개월간의 위탁교육과정을 이수한 다음 소위로 임관, 49년 연말경 제주도로 이동하여 육군부대와 교체된 해병대의 모슬포부대의 소대장(2대대 6중대 1소대)으로 임명되어 자체훈련 겸한 도내의 치안유지 및 4.3사건이 발생한 후 그때까지 육군주둔부대에서 맡고 있던 한라산의 공비토벌작전도 아울러 수행했었는데, 다음에 소개하는 북괴의 대남방송과 관련된 화제의 주인공이 바로 이원경 소위이다.

 

어느 날의 대남방송

 

즉 6.25전쟁이 발생하기 직전인 그해 4월 어느 날 6중대 1소대장 이원경 소위는 분대규모의 토벌대를 직접 지휘하여 서귀포 옆 성호리를 거쳐 흑미 부근의 빽빽한 관목지대로 접근해 갔을 때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느닷없이 울린 한 방의 총성과 함께 이 소위가 쓰고 있던 전투모가 돌풍에 휘말려 날아가듯 확 벗겨지고 말았고, 아차 하는 순간에 위기를 모면했던 이 소위는 잃어버린 전투모를 찾을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저격을 당한 현장에서 벗어나  다른 길로 목적지로 향했는데, 문제는 그런 일이 있은 뒤 북괴는 대남방송을 통해 그 전투모에 적힌 이 소위의 소속과 계급 성명을 무전으로 입수하여 “오늘 우리 한라산부대의 명사수가 발사한 한 방의 총탄이 2대대 6중대 소대장 이원경 소위의 머리를 정통으로 맞춰 즉사케 했다”고 사실과 다르게 보도하는 바람에 그 방송을 청취한 사령부 참모장 김성은 중령이 직접 모슬포부대를 방문하여 흑미에서 갓 돌아 온 이 소위를 직접 만나 그 방송얘기를 꺼내며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밖에 해병실록 ‘덕산에서 월남까지’의 상권에는 처녀공비 연옥이와 관련된 흥미 있는 얘기와 공비들이 야생우마들을 마구 잡아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소와 말의 등과 복부에 하얀 DDT가루를 뿌려 공비들로 하여금 독을 뿌려 놓은 것처럼 의심케 했다는 얘기 등을 파창풍벽(破窓風壁)의 모슬포부대 병사(兵舍) 얘기 등과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화제들은 모두가 이원경씨로 부터 제공받은 것이었다.

 

발왕산과 용산리의 추억

 

해병제1연대가 육군3군단의 작전을 지원한 영월․정선․평창지구 전투 때(51.2~3) 당시 2대대의 화기중대장이었던 이원경 중위는 다음과 같은 화제를 남겼다. 즉 3월 초순경 백설에 덮인 발왕산(평창군)을 넘을 때 이원경 중대장은 81밀리 박격포의 포신을 운반하고 있던 대원이 한밤중에 얼어붙은 고개 위에서 넘어져 포신을 떨어뜨리는 사고가 발생하자 그 포반 대원들이 고지 아래로 굴러내린 포신을 찾아올 때까지 약 1시간 동안 전 중대원을 추위에 떨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게 했는데, 그러한 일로 추월을 할 수 없게 된 후속중대(7중대)의 중대장은 7중대까지 낙오중대가 되겠다며 분통을 터뜨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발왕산을 넘어 용산리에서 수색전을 펴고 있던 화기중대 대원들 중에는 식량이 떨어져 화전민의 움막집을 뒤져서 구한 옥수수를 날것으로 먹고 설사를 하게 된 덩치가 큰 대원의 저녁 무렵 모닥불에 엉덩이를 쬐며 젖은 부위를 말리다가 옆에서 총기손질을 하고 있던 대원의 오발로 복부에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그러한 사고가 발생하자 이원경 중대장은 일몰 후 1개 분대의 대원을 차출하여 나뭇가지를 꺾어 상여를 연상케 하는 큼직한 들것을 그곳에서부터 약 4키로 거리에 있는 대대 구호소까지 그 대원을 운반해 가게 함으로써 가까스로 빈사지경에 이른 그 대원을 회생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정평이 나 있던 CPX 전문가

 

휴전 후(54~59년) 미 야전군에서 개설해 놓은 연천지구의 나이트메어(악몽) 훈련장에서는 미 야전군 산하의 거의 모든 보병대대와 일선지구에 배치된 한국 육군 및 해병대의 거의 모든 보병대대가 1년에 한 차례씩(3일간) 실전을 방불케 한 공방훈련을 실시했는데, 그때 심판관 또는 통제단장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이원경씨는 그러한 재능을 타고났던지 그 후 전후방 부대에서 CPX훈련을 실시할 때마다 전문가다운 능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66년 8월부터 1년 간 국방대학원 교수직을 역임한 데 이어 진해 교육기지사령부의 교수단장 직무대행 겸 지휘참모대학 초대 부총장으로 임명되었던 그는 그 후 연대장 제2훈련단 참모장 등의 요직을 거쳐 70년 2월 대령의 계급으로 예편했으며, 예편 후 아진관광(주) 회장, 수정탕(대중목욕탕) 대표, 이륙교통(운수업체) 사장 등을 역임하는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사 등 전쟁사와 관련된 많은 서적을 섭렵했으며, 특히 이촌동에서 수정탕을 경영할 시에는 그 목욕탕의 단골손님들인 소설가 정비석씨, 체육인 손기정씨, 종교인 윤병만씨 등과 어울려 KBS 장수무대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지금은 모두가 고인(故人)이 되고 말았다.

 

후진들에게 “자신의 분수를 알고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조언을 남겼던 이원경씨는 자신에게 주어진 예편 후의 여생을 근검절약하며 성실하고 보람 있게 살다가 98년 8월 8일 향년 72세로 타계했으며, 유해는 생전에 남긴 고인의 유언에 따라 국가유공자이면서도 국립묘지를 택하지 않고 유족들에 의해 인천(검단)에 있는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3 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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