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軍事) - 8대 수송감 역임한 임종화 대령
경기도 여주출신(1926년생)으로 일찍이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한 그 해 모 고등학교의 교사로 발령이 났으나 6.25전쟁의 발발로 천직으로 알고 있던 교직계와 인연이 끊어지고 말았던 임종화씨는 그 운명적인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 51년 월 서울지구에서 해병대 신병5기로 지원입대하게 되었고 진해에서 소정의 훈련과정을 수료함과 동시에 운전기술 보유자로 분류된 15명의 동기생들과 함께 해군종합학교에 부설된 해군자동차학교(3기)에 입교하여 2주간의 운전교육을 받은 연후에 일선지구로 출동, 2대대 작전장교(조성준 중위)의 운전병으로 배치 받아 화천지구 전투와 도솔산지구 전투에 참가했으며, 그 후 52년 해간 8기로 임관(52. 4. 12)하여 해간 11기 사관후보생 교육대의 구대장 근무를 했던 그는 휴전 후 육군 고급부관학교를 거쳐 대대 및 연대본부의 인사부관으로 근무하던 중 54년 10월 자신의 진로 선택에 따라 육군수송학교를 졸업하게 됨으로써 수송병과로 전과하게 되었고, 그 후 약 10년 간 보급정비단을 비롯, 교육단 사령부 1사단 등 여러 부대에서 수송중대장 정비담당관 운영과장 등을 역임하다가 65년 9월 청룡부대 결단시에는 초대 수송참모로 임명되었다.
청룡부대 초대 수송참모
사령부 소송감실 운영과장으로 근무하던 중 청룡부대의 초대 수송참모로 발령을 받고 월남으로 출정을 하게 된 임종화 소령은 9월 20일 결단한 청룡부대가 10월 3일 부산에서 출항할 때 미 해군 수송선이 탑재된 장비와 승선한 병력을 눈여겨보며 물론 해병제1상륙사단의 송선계획과 탑재계획에 의거 이루어진 것이긴 했지만 초대 수송참모라는 당무 장교로서 말 할 수 없이 뿌듯한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고, 더욱이 창설 당시 389명의 근소한 인원에 불과했던 해병대가 6.25전쟁기를 거쳐 믿음직스럽게 자유민의 전우를 돕기 위한 해외 원정의 길에 등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격세지감이 느껴진 만큼 감회가 컸었다고 한다.
한편 10월 9일 캄란만에 상륙한 뒤 자체 수송능력을 갖지 못하고 있던 청룡부대는 주월한국군사령부의 군수지원 계획에 따라 작전을 할 때마다 청룡부대에 배속시킨 육군군수지원 대대의 트럭 중대의 지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지원이 원만하게 잘 이루어졌던 일에 대해서도 감사히 생각하며, 자유월남공화국은 패망하고 말았지만 주월기간 중 자신이 티우 월남공화국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표창장은 역사의 증표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말한다.
대가 끊긴 8대 수송감
월남으로부터 귀국(66년 9월)한 후 사단 군수참모실 장비과장, 탑재참모, 사령부군사발전위원회 위원을 거쳐 사단 수송대대장을 역임했던 임종화 중령은 그 후 지휘참모대학(11기) 수송감실 기획과장을 거쳐 73년 1월 1일 제8대 수송감으로 임명되는 영예를 누렸으니 그 이듬해 10월 10일 부로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고 몸통만 해군에 통폐합되는 충격적인 수난을 겪는 과정에서 사령부가 해체되는 바로 그날 대령의 계급으로 예편함으로써 마지막 수송감으로 기록되는 그 8대 수송감 자리에서 물러나는 아쉬움을 남겼다.
타군에 앞선 제도개발
62년 6월에 탄생이 된 해병대 수송감실의 초대 수송감은 조성구 중령이었고, 2대는 조의정(대령) 3대는 조성구(대령) 4대 이섭(대령) 5대는 조성구 6대 김하모 7대 장진환 8대 임종하 대령이었다.
그런데 비록 타군 보다 늦게 탄생이 된 수송감실이긴 했지만 언제나 타군에 앞선 창의적인 제도를 개발하여 시행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과거 11년간 사령부 수송감실에서 근무한 김상훈씨(예. 상사)의 증언에 따르면 인원이 많은 육군에선 국방부로부터 배정받은 관련 예산으로 단체 수송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었지만 개개인을 중시한 해병대 수송감실에서는 그 실례로 서울이나 대전 대구 등지에서 진해로 여행하는 장병들이 후불권으로 경전선(서울-진주간) 열차를 탈 수 있게 함으로써 삼랑진에서 차를 갈아타지 않고 밀양역을 경유하여 곧바로 창원이나 마산역을 거쳐 진해로 갈 수 있게 했고, 또 고속버스가 개통된 뒤에는 철도에만 의존하지 않고 후불권 제도를 발전시켜 고속버스를 타고 포항까지 갈 수 있게 했을 뿐 아니라 영일비행장과 진해 덕산비행장까지 갈 수 있게 함으로써 그러한 제도를 처음 본 타군 장병들의 부러움을 샀던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수송감실의 산 증인인 김상훈씨는 고속버스(경부간)가 개통한 뒤인 72년 사령부 수송감실에서는 예하부대로 수송해야할 군수물자를 저장된 장소로부터 신속하고 안전하고 예산이 절감되는 방법으로 직송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 끝에 임종화 수송감 자신이 직접 국방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공문을 기안하여 결재를 득함으로써 그 제도를 타군이 앞서 선도적으로 시행했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용역은 유사시에 지체 없이 작전에 투입되어야할 군용 트럭의 파손과 타이어의 마모를 고려한 불가피한 조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한편 이와 같은 증언을 남기고 있는 김상훈씨는 언젠가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역 R.T.O 앞을 지나치면서 해병대의 명물과도 같은 강 문관을 보았다는 말이 전해진 적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사령부 수송감실에서 그 강 문관을 R.T.O에 배치해 놓은 것도 여행 장병들의 편의 제공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한국건장기업 운영
예편과 동시 OPC(동양정밀공업주식회사)의 업무부장으로 취업하여 2년간 근무했던 임종화 대령은 80년부터 약 10년 간 한국건장(建裝)기업사를 운영하며 지난날 모군에서 함께 복무했던 동료 또는 선후배들과 교분을 돈독히 다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건장기업사를 정리한 뒤 약 3년간 애플디자인사의 고문으로 재임했던 임종화 대령은 그 뒤로는 사업과는 인연을 끊고 세상을 달관하며 조용하게 여생을 살아가고 있는데, 해방 후 교사를 천직으로 알고 사범대학에 다녔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 그에게 새삼스럽게 후회가 되지 않느냐는 필자의 물음에 그는 “북괴의 남침으로 조국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섰을 때 해병대에 입대하여 목숨 받쳐 나라를 위해 싸움으로써 조국의 국방을 위해 이바지했고 또한 22년간에 걸친 군복무를 통해 모군의 발전을 위해 기여하게 된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3 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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