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軍事) - 천자봉에 해병혼 공사를 한 김찬기 상사
(머리말) 진해 동천에 우뚝 솟아 있는 천자봉(△620, 정상 높이 80척 둘레가 40척 가량 되는 시루모양을 한 신령스러운 봉우리가 좌정하고 있어 예로부터 시루봉으로 불리우기도 했음)은 1949년 4월 15일 덕산비행장 격납고 속에서 역사적인 창설식을 거행했던 대한민국 해병대의 정신적 육체적인 도장이 되어 있던 상서로운 전설이 깃든 영봉이며, 창설식이 거행된 후 제일먼저 이 봉우리에 올라갔던 중대는 창설기에 해병1기생들의 교육을 위해 편성했던 102중대 중의 제1중대(장, 고길훈 대위. 선임장교 정종철 소위) 대원들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시기는 1기생들의 입대식이 거행된 날로부터 약 5주가 경과된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아침(식전)이었고, 강훈을 위해 전 중대원을 단독무장으로 비상소집했던 선임장교 정중철 소위는 우중을 무릅쓰고 대원들을 선두에서 인솔하여 덕산동에서 천자봉으로 나 있는 소로를 거쳐 천자봉 턱밑까지 올라간 다음 하산할 때에는 덕산동으로 내려가지 않고 웅동과 장천을 거쳐 귀대했다고 한다.
한편 1중대의 등반이 효시가 된 그 천자봉 등반은 그 후 모군의 진주․제주도 주둔기와 6.25전쟁으로 인해 상당기간 중단되었다가 휴전 후 대를 이어 입대한 신병들과 하사관 및 사관후보생들에 의해 ‘천자봉 구보’라는 명칭 하에 오랜 세월 이어져 나왔고, 그러는 과정에서 158기 사병들이 입대한 64년에 이르러서는 당시의 진해 교육사령관 김용국 소장의 지시로 천자봉이 해병들의 정신적 육체적인 도장임을 만 천하에 공표를 하듯, 이 지면에 게재한 사진이 입증하는 것처럼 천자봉의 목, 어깨(오른쪽) 및 왼쪽 가슴부위 세 곳에 큼직하게 터를 잡아 해병혼 석자(三字)를 돌로 조형하여 흰 색깔로 표지해 놓음으로써 천자봉을 해병혼이 깃든 산으로 강렬하고 선명하게 부각시켰던 것인데, 그 당시 교육기지 사령부의 영선대 선임 하사관이었던 김찬기(해병 1기, 예. 상사)는 그 공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기고 있다.
김찬기 상사의 증언
그 당시 진해기지 사령부 영선대장 대리근무를 하고 있던 공병장교 김삼율 대위로부터 기지 사령관의 특별지시로 천자봉에 해병혼이란 입간판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표시 나지 않고 암석이 높은 곳을 골라 터를 크게 잡아 훈련소 연병장에서 똑똑히 바라보일 만큼 큰 글자를 한 자 한 자 떼어 돌로 짜서 만든 다음 횟가루로 칠을 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하는 김찬기씨(예. 상사)는 그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2~3일 간 휴대용 무전기(SCR 300) 한 대와 줄자(다키자쿠) 등 장비를 가진 2~3명의 대원을 데리고 천자봉으로 올라가 훈련소 연병장에서 같은 무전기를 가지고 천자봉을 바라보고 있는 영선대장의 조정을 받아 가며 풀이 나지 않고 암석이 많은 세 군데를 물색한 다음 한 글자의 크기가 사방 30미터 정도가 될 만큼 글자로 재고 쇠막대기를 박아 터를 잡아 놓고 정지작업을 한 연후에 돌을 날라 설계도 없이 글자를 짜 맞춘 다음 글자가 또렷하게 들어나도록 미제 횟가루로 도색을 했다고 하며 2주간의 작업 기간 중 고지 아래쪽에서 주워 모은 돌과 횟가루 포대를 공사장으로 운반한 사람들은 158기 신병들이었고, 공사 시작 전날 현장으로 파견된 1개 분대의 하사관학교 생도들은 천자봉 뒤편에 쳐놓은 분대천막에서 기거하며 공사장의 일을 도왔다고 한다.
그 당시 일을 돌이켜 보며 김찬기씨는 특히 한 여름철이었는지라 횟가루 포대(약 30포)를 어깨에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고지 위로 올라오는 신병들의 어깨에 땀에 젖은 미제 횟가루 포대의 밑바닥에서 배어난 횟가루가 엉겨 있었던 일과 공사를 마치고 귀대했을 때 훈련소 연병장에서 천자봉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던 158기 신병들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73년 10월 10일 이후
64년 여름철에 이루어졌던 이 해병혼 표지공사 후 대수를 이어 입대했던 신병들과 해병학교의 사관후보생 및 하사관학교의 후보생들은 청룡부대의 월남파병기(65. 10~72. 2)를 거치는 가운데 교과과정에 편성된 천자봉 구보를 되풀이 하며) 불패 상승의 전통을 이어나갈 것을 다짐해 왔으나 73년 10월 10일 유신 독재정권에 의해 토사구팽를 당하듯이 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되고 몸통만 해군에 통폐합된 뒤로는 49년 모군의 창설기 부터 이어져 왔던 그 해병대와 천자봉, 천자봉과 해병대와의 관계는 그로부터 14년 뒤(87. 11. 1) 해체되고 없던 해병대사령부가 작은 규모로 나마 부활이 되긴 했으나 그 14년간의 단절 속에 인연이 끊겨지고 말았던 진해와 해병대와의 관계가 복구되지 못했듯이 그렇게 단절이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제2의 천자봉
제2의 천자봉이란 해병대사령부가 재창설되기 1년 전인 86년 12대 제2훈련단장으로 취임한 김갑상 준장(해간 28기)이 해병들의 정신적 육체적인 도장이 되어왔던 진해지구의 천자봉을 아쉬워했던 나머지 월성군과 영일군의 경계지대에 있는 대왕암(大王岩, △478)을 제2의 천자봉으로 발굴했던 것인데, 이와 관련된 얘기는 본서에 수록된 ‘제2의 천자봉을 발굴한 김갑상 장군’ 편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정대기 회장의 증언
한편 현 진해시 해병전우회 회장 정대기씨(하교24기 부사관 출신)의 증언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 집권기인 2004년 어느 날 진해시청 총무과로부터 보내온 다음과 같은 내용의 민원을 접수했다고 한다.
즉 모처에서 진해사람으로 인터넷에 띄운 글을 복사해서 첨부한 그 민원서류를 보니 천자봉이라고 표지 해 놓은 그 공사가 장복산의 자연경관을 훼손했으니 없애도록 하라는 것이었기에 진해시장이 그 민원에 대한 답변을 할 수 있도록 첫째는 표지를 한 장소(세군데)가 풀이 나지 않는 암석지대이고, 둘째는 창설기 때부터 인연을 맺었던 천자봉은 신병들과 하사관후보생 및 사관후보생들이 해병혼을 연마하기 위해 단독무장으로 무수히 오르내린 역사성을 지닌 해병들의 정신문화재와 같은 봉우리라는 요지로 정리한 답변자료 제출한 뒤로는 그 민원인으로부터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금년 2월 초 해병대 출신의 네티즌으로부터 해병혼이란 글자를 휜 페인트로 도색하지 말고 꽃이나 단풍나무 가지로 장식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제안성 민원을 접수했으나 그 방법은 한시적인 것이 아니겠느냐고 그 네티즌에게 답변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울러 정 회장은 73년 10월 이후 천자봉의 해병혼 표지 도색은 1년에 1~2회씩 진해육상경비대(구 해병막사)에서 맡아 왔었고 근년에 이르러 진해시 전우회에서도 2~3 차례 맡은 적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한 번 칠 하는데 백색 수성페인트 6통(20L)이 드는 이 도색을 지속해 나가기 위한 근본 대책을 강구중에 있으나 만약에 진해시청에서 동네산(△43)에 세워져 있는 해병대의 발상탑과 해병혼이 깃든 천자봉을 성역화하고 군항도시인 진해시 일원을 안보관광단지로 조성하는 계획을 추진한다면 그 문제도 자동적으로 해결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3 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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