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軍事) - 울진으로 출동했던 5분대기조의 박홍성 대대장과 중대장들
1.21사태(무장간첩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사건)가 발생했던 그 해(68년) 11월 2일 유사시에 대비하고 있던 해병제1사단 5분대기조의 지휘관 5연대 2대대장 박홍성 중령은 사단본부의 명령에 따라 11월 4일 육군38사단에 작전상 배속되어 트럭 편으로 무장공비의 최초 출현지인 경북 울진으로 출동했으나 울진에 나타났던 공비들이 아군의 출동으로 내륙으로 북상 이동하는 바람에 삼척에서 1군단 11사단으로 작전상 배속이 변경된 상태에서 추위가 닥치고 눈이 내린 삼척 태백 고한 사북 정선 및 대관령 일대에서 약 2개월 간 혹독한 고생을 하며 토벌전을 수행했다.
여기에 수록된 내용은 당시의 5연대 2대대장 박홍성씨(예. 중령) 7중대장 진창화씨(예. 대위) 5중대장 강신형씨(예. 대위) 당시 5연대 2대대에 배속이 된 사단본부직할 수색중대(이한종 중대장 외 32명의 산악작전팀)의 대원이었던 유명준씨(현 자연보호중앙회 총재) 및 6중대장 윤한원씨(예. 대령) 등의 증언 및 사령부 군사과에 소장되어 있는 관련 자료 등을 참고로 하여 엮은 것이며, 69년 1월 2일에 종료된 토벌작전 기간 중 육군과 해병대의 토벌부대는 울진과 1군단지역(강원도)에 침투한 약 120명의 무장공비(15명 단위 8개조로 추정) 중 106명을 사살했고, 그 106명 중 해병토벌부대가 사살한 숫자는 16명이었다. 다음은 7중대, 5중대, 수색중대 순으로 정리한 교전기록이며 11월 17일 6중대가 삼척군 가곡면 풍고리에서 거둔 전과(1명 사살)에 대한 설명은 생략키로 한다.
7중대의 교전
7중대가 교전을 한 날짜는 11월 29일이었으며 장소는 정선군 남면 무릉리였다.
이날 암치 6시경 중대 CP의 야전변소에서 용변을 보고 있을 때 근처에서 들리는 까치소리를 듣게 된 7중대장 진창화 대위는 용변을 본 후 중대CP로부터 약 5키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던 5소대(1대대로부터 배속 받은 소대)장 정횡열 소위가 무전기로 민간인들의 제보로 공비들이 숨어 있는 곳을 발견하여 포위 중에 있다고 하자 중대장이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되도록 그들을 사살하지 말고 투항시키도록 하라고 지시를 했으나 그 후 정 소위가 핸드마이크를 들고 “너희들은 포위되었으니 손을 들고 나오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며 투항할 것을 권하자 되려 “네놈들이 공산당에 입당하라우”하며 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지며 수숫대로 가려진 은신처에서 한 사람씩 나타나기에 어쩔 수 없이 5소대 대원들은 집중사격을 가해 4명 전원을 사살하고 말았다.
그리고 트럭을 타고 현장으로 향하는 도중 그와 같은 교전보를 받은 7중대장은 자신이 월남전에서 체험했던 일이 염려되어 정 소대장에게 자신이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로 시체들을 만지지 말라고 지시함으로써 공비들의 시체를 안전하게 수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즉 대원들이 소지한 산악전 용 로우프로 각 시체의 발목을 조심스럽게 묶은 다음 낮은 곳에 엎드려 끌어 당겼더니 월남전의 경우처럼 시체 밑에 부설 해 놓은 부비트랩은 없었지만 시체가 뒤집히는 과정에서 공비들이 지니고 있던 수류탄이 폭발함으로써 그러한 염려를 제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7중대에서 4명의 공비를 사살했다는 보고에 접한 1군단사령부 대간첩작전본부에선 즉시 헬기를 보내어 운반해 갔고, 5소대 장병들이 노획한 소련제 망원경과 고급 카메라 등도 함께 수거해 갔다고 한다.
5중대의 전과
5중대의 교전일은 12월 12일이었고, 장소는 명주군 왕산면 묵계리에 있는 언덕배기 독가촌이었다. 당시 대관령 정상에 설치해 놓은 OP에 대대의 전방CP를 두고 있던 5연대 2대대장 박홍성 중령은 그 OP 북동쪽 8~9부 능선에 5중대와 수색중대를 분산 배치하여 대기시켜 놓고 7중대를 고지 하류(명주군 완산면)로 내려보내 예비군과 민간인들로부터 제보를 받도록 했는데, 그 결과 평지에 있는 경찰관 파출소에 중대 CP를 두고 있던 7중대장 진창화 대위는 그날 새벽 3시경 파출소장도 비상근무를 하고 있는 그 중대 CP에 나타난 60대의 한 노인이 하루 전에 자기 집(언덕배기 위의 독가촌)에 쳐들어 와 자기를 찾아온 어린 조카아이를 인민재판을 한다면서 칼로 찔러 죽인 3명의 무장간첩이 숨어있다고 말하자 즉시 대대장에게 보고한 다음 작전을 개시할 생각이었으나 보고를 받은 대대장이 “귀관은 이미 전과를 올렸으니 5중대장이 내려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협조를 하시요!”라고 하는 바람에 그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편 뿌옇게 날이 샐 무렵 중대의 전 병력을 이끌고 지서 부근에 도착한 5중대장 강심형 대위는 즉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7중대장을 파출소에서 만나 파출소장도 동석한 가운데 제보된 내용을 직접 확인하는 한편 공비들이 깊이 잠든 사이에 몰래 빠져 나와 신고만하고 급히 돌아간 그 노인이 들어가기 전 파출소장과 7중대장에게 날이 밝은 뒤 마당에서 소여물을 썰며 그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다가 자취를 감출 때 공격을 하라고 말했다는 그 말을 되씹으며 일단 1,2,3소대로 하여금 독가촌을 포위케 한 연후에 육안으로 바라보이는 그 집 마당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중 이윽고 그 기회가 포착되자 급히 마이크를 들고 “나 국군중대장이야. 너희들은 포위당했어. 손들고 나오면 목숨만은 보장하겠어”하고 투항할 것을 권고해 보았으나 그들이 가옥 안에서 총을 쏴대며 저항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일전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면에 배치시켜 놓은 중대본부 소대 대원들 앞에서“이제부터 공격을 개시하겠어. 중대장이 앞장설 테니 나를 따랏”하고 외쳤을 때 그 현장에서는 제대 날짜를 한 달 앞두고 있던 4명의 월남전 참전용사들이“중대장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희들이 앞장서겠습니다.”하며 성큼 앞으로 나서는 바람에 5중대는 한층 사기가 고무된 가운데 공격을 개시했고, 날쌔게 지붕 위로 뛰어 올라간 2명의 대원들 중의 1명이 갈대 껍질로 이은 썩은 지붕 속에 수류탄을 집어넣어 폭발시킴으로서 그 언덕배기 위 독립가옥에 침투한 3명의 무장공비를 전원 몰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 시체들을 수거할 때 대원들은 그 집 부엌에 방치되어 있는 그 노인 조카의 끔찍한 시체도 목격했다고 한다.
수색중대의 교전
수색중대의 교전일자도 12월 12일이었고 지역도 5중대가 투입된 바로 그 지역이었다. 이 날 새벽 3시경 5중대가 출동할 때 그때까지 특수부대이면서도 기회를 얻지 못해 사기가 저하되어 있던 수색중대장 이한종 대위는 어떻게 해서든지 기회를 포착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대대장의 승낙을 받고 그 뒤를 따랐는데, 그 결과 5중대의 교전을 지켜보고 있던 이한종 중대장은 5중대의 상황이 끝나 뒤 소대장 1명을 포함한 32명의 대원(산악전팀)을 지휘하여 민간인의 제보가 있는 계곡으로 이어진 야산(묵제리)을 군견을 앞세우고 수색하던 중 방뇨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인분을 발견한데 이어 바위로 가려져 있는 계곡 은밀한 곳에 이르러 군견이 짖어 대는 것을 보고 그들의 은신처를 발견, 그들을 신속하게 포위한 다음 집중사격을 가할 작정이었으나 소대장 구정부 소위가 막대기에 휜 천을 걸어 놓고 육성으로 그들의 투항을 권유하는 과정에서 목소리가 굵직한 공비 하나가 “우리는 남조선을 해방시키려고 왔는데 투항을 하다니…”하자 구 소위는 비위가 상했던지 “너희들은 김일성에게 속고 있는 거야”하고 말했는데 그 말이 화근이 되어 구 소위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방의 총성과 함께 이마를 저격당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고, 그러한 변을 당한 수색중대 대원들은 일제히 집중사격을 가해 그 은신처에서 저항하는 7명의 무장간첩을 전원 사살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그들이 바위 밑에 숨겨 둔 지뢰 등이 함께 폭발하는 바람에 그 계곡을 죽음의 계곡으로 화하게 했다고 한다. 이상 3개 중대의 교전자료 중 7중대와 5중대 것은 당시의 7중대장 진창화씨와 당시의 5중대장 강심형씨로부터 직접 취재한 것이며, 수색중대와 관련된 부분은 당시 그 교전에 참가했던 유명준씨(자연보호중앙회 총재)의 증언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6중대장 윤하원씨(예. 대령)의 말에 따르면 6중대는 후속중대가 되어 11월 17일 삼척지구에 공비 1명을 사살한 것 외엔 이렇다할만한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이밖에 수훈자들에 대한 훈장 내신과 작전 종료 후 1군단 본부에 개최된 관련된 사항 등이 있으나 지면관계로 생략한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이 지면에 게재된 사진은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에 건립되어 있는 이승복 어린이의 기념관이다.
그 해(68년) 12월 9일 이 산골마을에 침투한 무장간첩들에게 초등학교 2학년의 어린 나이(9세)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가 칼로 입이 찢기고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 등 4명이 즉석에서 무참하게 학살을 당한 그 원혼을 위로하고 천인이 공노할 그 만행을 만 천하에 고발하기 위해 82년 강원도 교육청에서 건립한 이 기념관에는(현재는 평창교육원 소관) 그간 전체 국민의 30프로에 해당하는 1,150만 명의 방문객이 다녀갔다고 하니(기념관장 박봉희씨의 증언) 자유세계의 자유인들에게 널리 고지해야 할 감동적인 화제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3 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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