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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軍事) - 제2의 천자봉을 발굴한 김갑상 장군

머린코341(mc341) 2014. 8. 21. 21:57

군사(軍事) - 제2의 천자봉을 발굴한 김갑상 장군

 

전무후무한 경연실적

 

1937년 해병대의 본 고장인 경남 진해에서 태어나 경화초등학교 진해중․고를 거쳐 해간 28기로 입교 임관(60. 1)했던 김갑상(金甲祥) 장군은 60년 1월 월남 전선으로 출정할 때까지 1사단 3연대에서 소대장 근무를 한데 이어 3대대 S-2 보좌관, 직할 경비대대 수사계장, 교육기지 교관, 상남보병훈련연대 교관 및 중대장, 해병학교 교육과장, 3대대 11중대장 등 여러 직책을 역임했으며, 파월된 후에는 3대대 정보장교를 거쳐 임명된 11중대장 근무기간 중(69. 6. 29) 김갑상 중대장은 2대대에 배속되어 디센군(호이안지구) 쑤웬탄면에 있는 까오라오 다리 부근에서 적의 공격에 대비한 차단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불운하게도 매설해 놓은 지뢰밭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 화근이 되어 급작스런 지뢰의 폭발로 끔찍한 변을 당할 뻔했으나 불행 중 다행스럽게도 좌측 다리에 파편이 관통하는 관통상을 입게 되어 매드백에 실려 다낭에 있는 미군 병원선에서 1차 수술을 받은 다음 3개월 후 청룡부대에 파견되어 있는 육군 군수지원단 야전병원에서 재차 수술을 받게 됨으로써 가까스로 병상에서 일어나 귀국할 때(70. 2)까지 청룡부대 인사과장으로 근무하다가 귀국길에 올랐다.

 

한편 귀국 후 함대 연락장교를 거쳐 3연대 인사주임장교, 5해역사 헌병대장 국방부조사대 조사과장 통제부육상경비대 보좌관(중령) 해군대학 교관 등 여러 직책을 차례로 거쳐 77년 4월 7연대 1대대장으로 임명되었던 김 장군은 그 1대대장 임기 중 특히 사단에서 개최한 12개 종목에 걸친 각 대대 대항 전술․전기경연대회에서 야전축성을 비롯, 천막가설 무장경기 차량정비 야전구호 291롱안테나 가설경기… 등 12개 종목 중 11개 종목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고 하는데, 1주일간의 경연기간 중 사단본부에서 구상한 심사단의 공정한 심사결과에 의한 이와 같은 기록은 전무후무한 기록이 될 것이라고 당시의 제1사단장 김정호 장군(제13대 사령관 역임)은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7연대 1대대 장병들의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필자의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당시의 1대대장 김갑상 장군은 이런 비화를 필자에게 공개했다.

 

즉 당시 사단 내의 각 대대에서는 식사 때 마다 1식 3찬(세 가지 반찬)을 차리고 있었으나 7연대 1대대장으로 부임한 김갑상 중령만은 취사장을 둘러싼 일체의 비리를 뿌리 뽑는 가운데 중대장으로 하여금 정성을 다해 4가지 찬을 차리도록 함으로써 대원들의 사기 앙양을 도모했고, 또한 휴가 간 대원들이 돌아올 때 가정사정이 어려운데도 선임자들에게 줄 선물꾸러미를 사들고 오는 폐단을 시정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김갑상 대대장은 일단 훈시를 통해 교육을 시킨 다음 그 결과를 확인하고 시정하기 위해 그들이 귀대하는 날 선임하사관들로 하여금 닷지차를 타고 북문과 남문의 위병소에 대기하고 있다가 대원들이 여전히 선물꾸러미를 들고 오자 그것을 수거하여 점심시간을 이용 중대별로 식당에서 나누어 주며 그러한 폐단이 없어질 때까지 되풀이 설득하는 등 대원들의 복지와 사기를 위해 지성을 다한 결과가 결국 자신의 지휘통솔력을 결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했다.

 

대왕암을 제2의 천자봉으로

 

한편 대대장 시절에 그와 같은 명성을 떨쳤던 김 장군은 80년 4월 대령으로 승진한데 이어 85년 1월 해간 28기 장교들 중에서 유일하게 준장으로 승진하는 영예를 누렸다.

 

그리고 86년 1월에는 해본해병참모부차장을 거쳐 제2훈련단 단장(12대)으로 임명되었는데 그 2훈단장 중 김갑상 장군은 영일군과 월성군 경계지대에 있는 대왕암(大王岩, △478)을 창설기 이래 뭇 해병의 정신적 육체적 도장이 되어 왔던 천자봉(△620)과도 같은 고지로 개발하기 위해 이 고지를 제2의 천자봉으로 명명함과 동시에 신라시대 때 무열왕의 제를 지낸 암자가 있었다는 이 고지 아래 6대 작전을 설명하는 입간판이 곁들여진 전통정신을 교육시키기 위한 교장을 설치하여 수료식을 앞둔 훈련병들이 2박 3일 간의 종합 야외훈련기간 중(첫날) 대왕암을 등반하고 내려왔을 때 계획된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훈련병들의 사기를 고무하는 역동적인 고장이 되게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것이 효시가 되어 그 후 해병대에 입대한 모든 신병들은 대수를 이어 한결같이 천자봉으로 인식되고 있는 이 대왕암을 2박 3일간의 종합야외훈련기간을 통해 등반하여 무적해병의 씩씩한 기개와도 같은 제패자로서의 기개와 긍지를 뽐내고 있다고 하니 고무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한편 김갑상 장군은 완전무장을 한 훈련병들이 부대에서 약 3시간의 행군 끝에 도착하게 되는 그 대왕암 등반이 포함된 2박 3일간의 종합야외훈련과 관련해서 대학(고려대)에 다니던 중 해병대의 717 신병으로 입대했던 자신의 장남(김지욱군)도 언젠가 “아버지 왜 그렇게 고된 훈련을 받도록 했습니까?”하고 말한 적이 있었을 정도로 고된 훈련과정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제대 후 고대의 총학생회장을 역임했던 그 장남(2세 해병, 현 뉴욕대학원 재중)은 대학에 다닐 때 늘 가방 속에 주먹만한 해병대 모표를 넣고 다녔다고 한다.

 

예편 후의 취업

 

86년 4월부터 약 2년간 제2훈련단장으로 근무하며 2훈단 발전을 위해 이바지했던 김갑상 장군은 89년 12월 31일 부로 해본군수참모부 해병차장직을 끝으로 준장의 계급으로 예편했다.

 

한편 현역 때 성균관대, 기업경영대학원을 이수한 경력의 소유자인 김갑상 장군은 예편 후 마산지구에 소재하고 있던 삼양광학(주)의 전무로 취임하여 사장직을 역임한 뒤 91년부터 만 5년 간 향우산업 전무로 재직하는 동안 도에 있는 사업소를 독립채산제로 운영하는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종전의 매출액을 10배 이상 끌어올리는 획기적인 운영실적을 남겼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곧 김 장군이 포항지구 해병대 본부소대장(중위)으로 근무할 때 부조리 척결을 위해 솔선수범함으로써 일생의 사표(師表)가 돼 준 당시의 포항지구 헌병대장 J 모씨를 지금도 존경하고 있다는 일화이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3 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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