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설기 - 해병대전우회 중앙회 강복구 총재
80만 예비역 해병들의 정신적인 지주(支柱)가 되고 있는 해병대전우회 중앙회. 16개 시도 연합회와 220개의 국내지회 및 49개의 해외지회를 두고 있는 전우회 중앙회의 강복구(姜福求)총재, 그는 ‘해병대의 기합의 대명사’ 란 아호(雅號)와도 같은 별명이 입증하듯 모군의 역사 속에 영원히 존재할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1923년 함경북도 북청에서 태어나 일제 때 해군의 징병 1기로 입대하여 복무하던 중 8․15 해방으로 귀국, 창군기의 해방병단에 입단한 후 중사의 계급으로 창설기의 해병대로 전입했던 그는, 가입대 중인 1200여 명의 해군13기 신병들 중에서 해병대에서 확보해야할 300명의 1기 신병을 모집할 때 검은 색안경을 쓰고 광채나게 닦은 반장군화를 신고 가입대자들 앞에 나타나 빳빳하다 못해 당장에라도 부러질 것 같은 절도 있는 동작을 취하며 표한(豹悍)한 눈매에 야무지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해병대란 일본해군의 육전대와 같은 특수부대로 적전상륙을 감행할 경우 백명 중 99명의 희생자가 날 수도 있다."고 말해 좌중을 얼어 붙게 했고, 그렇게 해서 모집한 그 300명의 1기 신병들을 일기 당천의 강병으로 육성할 때 그는 그 교육대의 소대장으로서 공헌을 했었다.
한편 해병대가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을 때 해간2기 전형시험에 합격했던 그는 시흥에 있는 육군보병학교 갑종2기로 입교하여 5개월 간의 교육과정을 이수한 다음 해사 9차 특교대에 입교했으나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6월 말경 사령부로 복귀하여 6개월 간의 보충교육을 받고 7월 27일 부로 소위로 임관함과 동시에 2대대 5중대 1소대장으로 임명되어 경인지구 작전에 참가했고, 도솔산 탈환작전 때는 3대대 9중대장으로서 고전을 면치 못한 13목표를 점령하는데 9중대 장병들과 투혼을 불살랐다.
그런데 6월 9일 13목표를 점령할 때까지 9중대는 3소대장 김학렬 소위가 중상을 당해 후송되고 2소대장 김문성 소위가 전사하는 등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수훈을 장석한 1소대장, 설태진 소위의 용전으로 마침내 그 목표고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그날 밤 9중대는 하부능선에 설치해 둔 분초(分哨)가 피습당해 분대원들이 납치를 당했을 뿐 아니라 적 역습부대가 돌격나팔을 불어대며 공격해 오는 바람에 위기에 처했으나 사전에 구성해 놓은 화망(火網)으로 적의 접근 예상로를 강타함으로써 동이 틀 무렵 적을 완전 격퇴시킬 수 있었다. 그날 밤 9중대는 바퀴가 달린 소련제 수냉식 중기관총 일정을 노획했는데 그 중기관총은 현재 1사단 황룡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대대 9중대(주공)와 1대대 3중대(조공)에 의해 942고지가 점령되던 날(51. 9. 1) 화기소대 진지에서 부대를 지휘하던 중 적진에서 투척한 수류탄의 파편에 한쪽 다리에 중상을 입고 쓰러졌던 9중대장 강복구 중위는 화기소대장 오정근 소위가 놀라서 달려오자 권총을 뽑아들고 대성일갈, ‘돌격대를 지원하라!’ 고 했고, 응급조치를 한 위생병이 노무자들(KSC)에게 들것에 싣고 내려가라고 하자 "고지가 점령되기 전에는 내려가지 않겠다"고 했던 그는 한참을 버티다가 출혈이 심해 노무자들이 서둘러 들것에 싣고 능선길로 내려가자 들 것 위에 꼿꼿이 앉은 채로 돌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고지 위에 시선을 못박은 채 하산함으로써 ‘지독한 독종’ 또는 ‘지독한 감투정신의 소유자’ 란 평을 들었다.
그리고 진해병원으로 후송이 되었던 강복구 중위는 공격 첫날(8.31) 지뢰 폭발사고로 부상을 입고 진해병원으로 후송된 1연대장 김대식 대령이 두 차례나 전령을 보내어 독방을 쓰고 있는 자신의 병실에서 같이 지내자고 권했으나 감사하다는 말만 전하고 그 호의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강복구 총재의 말에 따르면 해병제1연대의 도솔산지구 방어기간 중 연대장이 9중대가 배치되어 있는 전초고지(도솔산)산록에서 길러온 생수를 야전 수통컵에 담아 대접을 하자 ?나는 내려가서 마시면 돼?하며 사양을 했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강복구 대위는 휴전을 전후하여 해병학교 중대장 해군사관학교 교관 등을 거쳐 71년 3월 대령의 계급으로 예편할 때까지 도서부대장 해병학교장 연대장 해병학교장 및 주월사 행정참모부장․보급정비단장 등을 역임하며 강병육성과 모국의 발전을 위해 기여했는데, 그 기간 중 특히 그는 자신의 훈련소장 재임기간 중(66.8.8)에 발생한 해병사관 35기 기초반 장교들의 김해 공군기지 습격사건 연루자들(전도봉 소위 등 기초반장교 6명과 중대장 1명 구대장 명)에 대한 군법회의(설치권자 교육기지사령관 박성철 소장)가 열렸을 때 그 군법회의의 재판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처음부터 형을 선고할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던 그는 직무유기죄로 처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 회의 진행자(사회자)가 "재판장의 선고가 있겠습니다."라고 하면 말없이 회전의자를 뒤로 돌려 면벽(面壁)을 한 채 침묵을 지키는 바람에 여러 차례 선고공판이 휴회되는 전무후무한 해프닝이 벌어졌었다. 그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는 제 2권속에 수록될 12대 사건 스토리에 수록된다.
97년 8월 22일 미 해병의집협회 서부지회(장, 짐내피어 예비역 미 해병대령)에서는 해병전우회중앙회 강복구 부총재를 미국으로 초청하여 존타드 캠프 팬들턴 미해병기지 참모장과 박용주 협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박 회장이 마련한 명예 장군패를 수여하여 화제를 모았는데, 그 뉴스를 보도한 한국일보 센디에고 주재기자는 8월 27일자 한국일보 센디에고판 보도기사에서 "도솔산고지 탈환작전 등 전쟁터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는데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강직한 군인정신으로만 일관해 온 탓으로 별을 달지 못한 채 예편하게 되어 아쉬움이 컸다."며 명예 장군패를 수여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고, ?강복구가 기합이 빠지며 해병대 전체의 기합이 빠진다?는 말도 덧붙였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1 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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