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설기 - 왕년의 관동군 총검술교관 강용 대령
해병대 창설기에 병조장(상사)의 계급으로 해병대로 전입하여 주방을 관리하는 주계(主計)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던 강 용 대령은 일제 때 소만국경에 집결해 있던 일본 관동군에서 개최한 총검술대회에서 우승을 하여 명성을 떨쳤을 뿐 아니라 그런 경력으로 관동군의 총검술 교관으로 활약했던 그는(최종계급 군조․軍曹), 해방 후 창군기의 해방병단에 입대하여 S․P(헌병대의 전신)를 창설할 때 S․P요원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당당했던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해방병단에 입대할 때 일본군 군조의 계급과 정예군으로 알려져 있던 관동군 총검술 교관이란 이력사랑이 기재된 그의 이력서를 본 해방병단 인사 담당자가 그의 입대신청서를 접수하기를 꺼려했다는 후문이 전해지고 있고, 또한 그가 해군에서 해병대로 전입했을 때 신현준 사령관의 책상 위에 앉아 무엄하게도(일제 때 만군 장교들을 멸시한 우월감 때문이었겠지만) “자네 정말 출세했네”라는 말을 했다는 그 강용 대령은 해병대 1기 신병들의 눈에는 이런 사람으로 비쳐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계급도 직책도 알 수 없는 그가 어쩌다 한 번씩 주계(취사장)에 나타날 때는 신병들의 배식량이 곱절 많아지는 바람에 도대체 저 사람이 누굴까 하는 생각들을 했다고 하며, 49년 8월 초순경 어느 날 사령부에서는 이승만 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 진해를 방문하는 장개석 총통을 연접하기 위한 의전행사를 위해 동네산(△30․일명 해병산) 앞에 37밀리포를 방렬해 놓고 작전참모 김동하 소령(만군 포병장교)의 지휘 하에 전 장병이 지켜 보는 가운데 실탄 발사연습을 할 참이었는데, 그 때 바로 그 의문의 사나이가 나타나더니만 “야 임마 무엇들 하는 거야. 내가 하는 것을 똑똑히 보란 말이야”라고 하더니만 익숙한 솜씨로 한 문의 포에 실탄을 장진, 발사하여 동네산 앞에 세워 놓은 표적을 명중시킴으로써 관중들을 놀라게 했고, 그런 다음에는 씨익 웃으며 그 자리를 떴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입증하듯 그는 자신의 우월감에 사로잡혀 간혹 오만불손한 언동을 취한 일이 있었으나 그를 제재한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해군에 있을 때 그에게 가차없이 기합을 준 사람은 오직 한 사람 S․P대장 황운서 대위 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포탄을 장진해서 발사하는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그가 일본군의 병기창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었기 때문이란 설이 있었다.
한편 해병대의 진주 주둔기에 해사 8차 특교대를 거쳐 소위로 임관했던 강 용 소위는 자신의 그 유명세 때문에 다음과 같은 곤욕을 치렀다. 즉 미 해병5연대와 4개 대대의 한국해병대 병력이 미지의 작전(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부산항을 출항하기 하루 전날 밤인 9월 11일 밤, 외출 금지령이 내려져 있는 상황 속에서 귀신 같이 외출을 하여 선술집 거리에서 뗑깡을 부린 하사관 계급장을 단 근성이 있는 한 대원이 “내가 강용이야” 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는 바람에 해군헌병대를 통해 보고를 받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이 “즉시 강용이를 체포하라!”는 엄명을 내리게 됨으로써 1대대 인사부관이었던 그는 외출을 하지 않고 대대장 고길훈 소령과 함께 대대본부에 있었는데도 서슬이 퍼런 손 총장의 엄명을 거역할 수가 없어 막무가내로 헌병대 영창에 수감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전화위복이란 말이 있듯 억울한 누명을 쓰고 손 총장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영창에 수감되어 있던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1대대 인사부관이 된 이홍빈 소위가 연희고지 전투에서 전사를 하기 직전에 영창에서 풀려나 다시 원대에 복귀하여 전사한 이 소위의 뒤를 이었는데, 그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동료장교들은 이홍빈 소위와 강용 소위가 어떤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기에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며 희비가 엇갈리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50년 10월 중순경 미 해병1사단과 함께 인천항을 출항했던 해병대는 일단 원산에 집결한 연후에 미 10군단의 후방 엄호작전을 수행했다. 그런데 1대대가 원산에 머물러 있는 동안 1대대 인사부관 강용 소위는 이런 사고를 저질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즉 그 당시 원산에는 9.28 후 동해안으로 진격하여 10월 10일 원산을 돌파했던 한국군 3사단의 헌병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육군헌병대가 눈에 거슬렸던지 아니면 주먹이 근질근질했던지 강용 소위는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헌병대장을 불러 내어 김 모 대위가 제지를 하는데도 사정없이 폭행을 가함으로써 살벌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일설에는 자신이 해병대의 대대장이라고 말하면서 그 헌병대장을 불러내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도솔산지구 탈환작전 때 1대대 3중대장이었던 강용 대령은 적탄이 빗발치고 있을 때 1소대장 김영상 소위에게 “어이! 소대장 위험해, 바위 뒤에 숨어 있어”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생사를 겨루는 전쟁터에서 그런 말을 한 지휘관도 드물 것이며, 이런 일화를 통해 남달리 부하를 아끼고 사랑한 그의 인간성을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강용 대령은 그가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보따리를 싸기만 하면 그곳으로 전속 발령이 난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비교적 좋은 보직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그가 보급 정비단 정비부장으로 있던 62년 그는 보급정비단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어 준장 진급 내정자로 알려져 있던 보급정비단장 한 대령 및 참모장 홍 모 대령과 함께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불명에 제대를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리고 그런 일을 겪는 과정에서 홧병에 걸렸던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독한 술을 마시며 자포자기 하다가 끝내는 50세를 넘기지 못하고 수유리의 셋방에서 불행한 삶을 마감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1 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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