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명인·기인

창설기 - ‘나가자 해병대’의 작사자 신영철 소령

머린코341(mc341) 2014. 8. 21. 22:05

창설기 - ‘나가자 해병대’의 작사자 신영철 소령

 

병1기로 입대한 후 해간7기로 임관했던 신영철 소령 그는 해병대가 창설된 직후 해병대사령부에서 공모 과정을 거쳐 처음으로 제정했던 군가 ‘나가자 해병대’의 작사자인 동시에 휴전 직전(53.6) 용두산 꼭대기의 천박촌에 위치하고 있던 해병대사령부에서 휴전을 앞두고 임시 경무대(경남도청 건물)로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기 위해 김해비행장을 통해 입부(入釜)하는 외국인 귀빈들을 영접하기 위해 편성했던 해병대사령부 의장대의 초대 대장을 역임한 해병대의 전설적인 명인이다.

 

 1924년 황해도 신막(서흥군)에서 출생하여 평양 대동공업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철도국의 기관사로 근무하다가 해방 후에 월남했던 그는 함께 월남했던 작가 김성민씨와 하숙생활을 같이 하며 김성민씨가 감독한 극영화 ‘청춘산맥’의 조감독 겸 엑스트라로도 출연하는 등 연예계에서 활약하다가 군장교로 입대하기 위해 그 당시 해군본부 정훈감으로 있던 평양 대동공업학교 은사인 이석훈 중령의 추천서를 가지고 창설 중에 있던 해병대사령부를 방문, 김성은 참모장의 배려로 1기 신병교육대에 입대한 상태에서 기회를 기다리며 강복구 소대장의 내무실에서 함께 기거하는 동안 강 소대장으로부터 해병대의 군가를 만들 작사를 권고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행진곡조의 가사인 ‘나가자 해병대’가의 가사를 만들게 되었고, 그것이 공모과정을 거쳐 당선작으로 선정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해 여름철 신영철씨는 해군사관학교에서 실시한 해병대 간부후보생 1기 시험에 응시하려고 했으나 응시자격이 하사관 이상으로 규제되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게 됨으로써 병1기로 수료한 후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51년12월 해간7기로 임관했다.

 

 한편 군산지구전투 때 수색소대에서 근무했던 그는 철수명령이 내려진 시각에 군산 외곽지대에 대한 정찰임무를 수행하고 진두태 분대장(상사)과 함께 해양대학에 위치한 부대본부로 돌아오던 중 명월관 앞에서 돌산에서 갈긴 적 정찰대에 총격을 받아 차량이 민가를 들이받는 과정에서 진두태 분대장과 함께 중상을 입고 전사자로 보고가 되었으나 피투성이가 된 그(신영철 해병)를 리어카에 싣고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게 해 준 민간인과 군산이 점령된 후 인민병원으로 간판을 바꾸어 단 군산 도립병원에서 누군가의 신고로 신분이 탄로나 위험에 처해졌을 때 그를 병원 근처에 있는 민가로 몰래 빼내어 보행이 가능할 때까지 상당기간 보살펴 주었을 뿐 아니라 인민병원의 퇴원증까지 발부해 준 간호원들(두 사람)의 도움으로 군산을 탈출, 10월 초순경 원산으로 출항하기 위해 인천에 집결해 있는 해병대에 복귀했는데, 그 날 저녁 무렵 죽은 줄 알고 있던 신영철 1병이 나타난 것을 본 신현준 사령관은 “네가 정말 신영철이란 말이냐?”하며 반가워했고 그 후 함흥지구에서 철수한 해병대가 부산을 거쳐 진해에 집결했을 때 장충단(獎忠壇) 묘지를 참배했던 신영철 해병은 그 묘역에 꽂혀있는 ‘고 해군일등수병 신영철지묘’라고 쓰여져 있는 나무로 만든 팻말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51년 12월 해간7기의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소위로 임관하여 5대대 중화기 중대 81밀리 박격포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장단지구 전투에 참가했던 그는 휴전을 목전에 둔 53년 6현 사령부 의장대의 초대 대장으로 임명되어 30명의 요원을 특별히 선발하여 철저한 기본훈련을 실시한 다음 이승만 대통령이 귀빈 영접을 위해 김해비행장으로 행차할 때마다 해군본부 군악대와 함께 비행장으로 나가 영접행사를 치렀는데, 그러한 일을 타군에서 맡지 않고 해병대에서 맡게 된 그 이면에는 해병대를 끔찍하게 좋아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각별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란 설이 있었다.

 

 해병대 장교와 육군장교들이 함께 교육을 받은 교육기관 가운데 특히 광주 육군보병학교의 초등군사반과 고등군사반의 피교육자들은 전쟁이 끝난 후 전쟁과 관련된 많은 화제를 전파하기도 했고, 생산하기도 했는데 그러한 화제 중에는 보은의 금반지에 얽힌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화제도 있었다.

 

즉 55년도 여름철 어느 일요일 해병대의 고윤석 소령(고군반)과 광주 시내의 모 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신영철 중위(초등군사반)는 찻잔을 들고 와서 잠시 자리에 앉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마담을 대하는 순간 분명히 어디서 본듯한 생각이 들어 기억을 더듬고 있던 중 유심히 자기를 바라보고 있던 그 마담의 입에서 “혹시 군산에서 부상을 입고 도립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셨던...”하는 말이 나오는 순간 이 여인이 바로 그 간호원 중의 한 사람이란 것을 알고 가슴 뭉클한 해후의 정을 나누었는데, 그 다음주 초 신영철 중위로부터 생명의 은인인 그 간호원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 간호원을 뜻밖에도 그 다방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감동적인 얘기를 전해들을 초등군사반 동기생들과 고윤석 소령으로부터 그러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고등군사반 장교들은 하나 같이 감동을 했고, 일부 초․고군반 장교들은 즉석에서 약간의 성금을 모아 그 여인에 대한 보은의 뜻을 표하기 위해 5돈짜리 금반지를 만들어 그 다음주 일요일 신영철 중위의 고향인 황해도 신막(서흥군)에서 거주하다가 전쟁 후 광주로 이주한 화교 음식점에서 10여 명의 초․고군반 장교들이 자리를 같이 한 가운데 증여식을 거행함으로써 훈훈한 화제를 꽃피웠었다. 그러한 일은 육군보병학교가 창설된 이래 처음 있었던 일로 기억되고 있고, 또 그날 그 중국집 주인은 기꺼운 마음으로 음식값을 받지 않고 무료봉사를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관운도 재복도 타고나지 못한 신영철 소령은 64년 소령의 계급으로 예편한 후 브라질로 이민을 갈 계획이었으나 그 계획마저 좌절이 되었고 군산에서 입은 총상으로 팔 다리 등에 지금도 상당수의 미세한 파편이 박혀 신체상의 장애가 있는데도 해군에서 치료한 기록이 없어 보훈처로부터 7급 부상으로 밖에 인정받지 못해 중병에 걸려 있는 부인과 함께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1 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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