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19. 海兵隊 司令官 時節
(1) 憲法守護 宣誓式
내가 제4대 해병대사령관으로 취임한 날짜는 6월 29일이었다.
그날 사령부 광장에서 거행될 예정이었던 제3대 해병대사령관과 제4대 해병대사령관의 이취임식은 우천관계로 사령부 장교식당에서 거행이 되고 그 식장에는 이종찬 국방장관과 메그루더 유엔군사령관 및 합참의장, 각군 총장 등 많은 군부 요인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4·19혁명이 일어난지 약 2개월이 경과된 그 무렵, 제2공화국을 탄생시키기 위해 출범한 허정(許政) 과도정부에서 내각책임제와 의회의 양원제(兩院制) 구성을 골자로 한 개헌과 총선거를 추진중에 있던 정치사의 중대한 전환기에 제4대 해병대사령관으로 취임했던 나는 그 시대가 요청하는 바에 따라 '정병육성(精兵育成)'과 '군의 민주적인 운영'이라는 두 개의 큰 지표를 설정하여 부대를 운영해 나가려고 했다. '국민의 군대' '국민의 자세'니 하는 말들이 바로 그러한 시기에 처음으로 등장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한편 4·19혁명 후 처음 맞은 제헌절인 그해 7월 17일 나는 이종찬 국방장관을 비롯한 전 각료가 배석한 중앙청 회의실에서 허정 내각수반에게 각 군 총장과 함께 헌법수호를 서약하는 선서를 했다.
"나는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수행을 사명으로 하는 국군의 참모총장(또는 해병대사령관)으로서 국헌을 준수하고 정치에 관여함이 있이 엄정 중립하여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이행할 것을 이에 선서함."
각 군 총장과 해병대사령관의 이와 같은 헌법수호 선서는 군의 정치적인 중립을 염원한 이종찬 장관과 허정 내각수반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두 분이 그러한 문제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었던 것은 3·15 부정선거로 몰락에 직면해 있던 자유당 정권에서 4·19때 서울에 투입이 된 계엄군(사령관, 송요찬 중장, 계엄군 부대장 조재민 소장)이 이미 천심과 민심이 떠난 이승만 대통령 정부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고 부패한 독재정권 타도에 나선 학생 시민 데모대를 억압하지 않음으로 해서 정치사의 흐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하자 장차 군부의 힘에 의해 정치의 흐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그 당시 육군총장은 최영희 중장, 해군총장은 이용운, 공군총장은 김창규 중장이었다.
그런데 각 군 총장들과 해병대사령관이 선서했던 그와 같은 헌법수호선서는 뒤에 언급이 되겠지만 이듬해 1961년 5월 16일에 발생했던 군사정변으로 인해 여지없이 파기되고 말았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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