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19. 海兵隊 司令官 時節 (3) 不運했던 李熙晶 提督

머린코341(mc341) 2014. 9. 6. 14:41

국방의 멍에 - 19. 海兵隊 司令官 時節

 

(3) 不運했던 李熙晶 提督

 

  민주당 정권이 출범한 뒤의 일이었다.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부가 무너지자 각 군 총장과 해병대사령관 등도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일괄사표를 제출한 국무위원들의 뒤를 이어 자진 사의를 표명하여 예편을 하거나 좌천이 되는 등 그 자리를 물러났는데, 더구나 4·19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명예롭지 못한 일로 여론의 표적이 되어 신문지상에 대서특필된 적이 있던 이용운(李龍雲) 해군총장만은 사표를 내거나 좌천도 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눌려 앉아 있었다.

 

  이 총장이 여론의 표적이 되었던 것은 격노한 학생들과 시민들이 서대문에 있는 이기붕(李起鵬) 국회의장 저택과 국회부의장 한희석(韓熙錫)시 저택을 방화할 때 이 총장이 한 부의장 저택을 몰래 매입했다는 사실이 탄로가 난 때문이었는데, 그러한 일로 해군의 명예가 손상이 되자 나의 집무실에는 매일 같이 해군의 젊은 제독들이 몰려와선 "얼굴을 들고 다니지를 못하겠으니 국방장관에게 건의하여 총장을 교체시켜 달라."고 호소하는 바람에 내 자신의 직무에 지장이 초래될 지경이었고, 마치 해병대사령관실이 해군의 조각본부(組閣本部)로 변모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월권행위인줄 알면서도 큰 집 일을 위해 나서지 않을 수가 없어 젊은 제독들의 의견을 청취한 연후에 누가 총장 적임자인가를 생각해 본 끝에 함대사령관 이희정 소장을 의중의 인물로 떠올리게 되었고, 이 제독이 총장으로 승진할 경우 부총장이나 함대사령관으로는 누가 가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도 나름대로 짚어 보았다. 해군의 사정에 정통해 있었던 나로서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 해군 내에는 같은 소장급 장교이면서도 이희정 제독보다 약간 선임자인 김일병, 김장훈, 김충남 제독 등이 있었지만 그 세 사람은 함장경험이 없는 행정장교들이었으므로 총장의 적임자는 될 수가 없었고, 그 당시 해군 내에는 해군사관학교 출신 병과장교 중심체제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을 했던 나는 적당한 날을 택해 장관실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나를 접견한 현석호 장관은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있는 해군총장에 관한 소식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총장의 인사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는지 의견을 말해 보라고 했다.

 

  장관의 주문이 그러하자 나는 기다렸다는듯이 총장을 교체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한 다음 지체될 경우 군의 사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했더니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적임자인지 말해 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함대사령관 이희정 소장을 천거했더니 현 장관은 그렇다면 이 소장에게 전화연락을 해서 내일 당장 나에게 오도록 하라고 했다.

 

  그리하여 사령부로 돌아온 나는 즉시 함대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장관께서 이 제독을 보자고 하시니 내일 아침 일찌기 서울로 올라오라고 전갈을 했더니 그는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느냐며 궁금해 하기에 "장관께서 해군의 큰 책임을 맡기실 모양이시더라." 고 했더니 그는 "진짜냐, 진짜?" 하며 흥분을 했다.

 

  그런데 할 일을 다한 나는 다음 날 아침 서울로 올라온 이 제독이 장관실에 들려 대명을 부여받고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나에게로 달려올 것이려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 다음 날 이른 아침 라디오 방송이 전해준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듣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나의 마음을 한없이 착잡하게 했던 그 뜻밖의 소식이란 대충 이러한 것이었다. 즉 나로부터 그러한 전화연락을 받은 이 제독은 기분이 너무 좋았던 나머지 친분이 두터운 육군대학 총장 김계원(金桂元) 소장과 부총장 김재규(金載圭) 준장과 함께 만산 오통동으로 가서 한 턱을 쓴 모양이었는데, 문제는 라디오 방송이 전한 것처럼 마산에서 거나하게 취한 이 제독이 스스로 차를 운전하여 마진고개를 넘어 오다가 운전실수로 차가 낭떠러지로 굴러내리는 바람에 중상을 입고 입원을 하게 되는 사고가 발생 한 것이었다.

 

  한데 그러한 사고가 발생하자 나는 한편으로는 망신살이 뻗친 해군의 일이 걱정이 되고 한편으론 이 제독의 불운을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천거한 사람이 그러한 사고를 저지르게 되자 나는 장관을 대할 면목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큰 집 일을 그대로 둘 수가 없어 그 다음날 재차 장관실을 방문했더니 과묵한 성품을 지닌 현 장관은 "그 사람 운이 없는 사람인 모양인데 누구를 총장으로 기용했으면 좋겠는가."하고 하문을 했다.

 

  그래서 나는 통영상륙작전 때 PC-703함 함장으로서 해병대의 작전을 지원한 전투경력의 소유자인 동시에 해군사관학교에서 해사 1기생들을 가르친 교관이력도 가진 이성호(李成浩) 준장(당시 연합참모본부 근무)을 천거하면서 이성호 제독외에 달리 적임자가 없으니 이 준장을 소장으로 승진시켜 총장으로 임명한 연후에 1~2개월 후 중장으로 승진시키면 될 것이라고 했더니 현 장관은 나의 진언을 그대로 수용했다.

 

  그리고 그러한 진언을 할 때 나는 큰 집인 해군과 작은 집인 해병대의 관계에 대해 이해가 가도록 충분한 설명도 드렸다.

 

  이성호 총장이 취임한 후 나와 이 총장은 큰 집과 작은 집의 유대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기 위해 이러한 노력을 기울였다. 즉 나는 해병대장교 한 사람을 해군 총장의 전속부관으로 파견하여 해병부관으로 근무하게 하고, 이 총장은 해군장교 한 사람을 해병대 사령부로 파견하여 사령관의 해군부관으로 근무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 총장과 나는 격일제로 해병대사령부와 해군본부를 교환방문하는 제도도 시행을 했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