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19. 海兵隊 司令官 時節
(2) 民主黨政府의 減軍努力
한편 그 해 9월 하순경 해병대에서는 제주도에서 '물소작전'으로 명명된 사단 수색중대의 상륙해안 정찰훈련을 실시했고, 9월 28일에는 김포반도에서 '횃불작전'으로 명명된 야외기동훈련을, 그리고 10월 8일에는 영일만에서 단풍작전으로 명명된 사단급 규모의 한·미 해병 합동상륙전훈련을 실시하여 특수작전을 주임무로 하는 해병대의 전투력 강화를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경주했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을 경주함에 있어 특히 나는, 장면 정부에서 총선(總選) 때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10만 감군에 우리 해병대의 병력이 삭감이 되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를 해병대의 특수훈련장에 모실 수 있도록 각별한 배려를 했다.
그 해 8월에 발족한 제2공화국의 민주당 정부에서 10만 감군을 단행하려 했던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었던 그 PL-480호에 의해 원조되고 있던 미국의 잉여농산물 판매대전 중의 약 80%를 가지고 운영하고 있던 정부예산 가운데 국방비로 충당되고 있던 약 40%의 예산을 감군을 통해 조금이라도 절약하여 피폐된 전후(戰後)의 경제건설을 위해 활용코자 함이었다.
따라서 4·19혁명 후에 사령관으로 취임했던 나는 총선거 때 10만 감군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민주당 정부가 출범하자 어떻게 해서든지 감군을 추진할 때 우리 해병대의 병력은 감축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텐데 하는 생각을 가지고 대책에 부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특히 나는, 4·19 때 해병 제1상륙사단에서 대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가 김대식 사령관에 의해 비서실장으로 기용된 독실한 가틀릭 신자이고 서울대학교 출신으로 영어도 잘 하고 인물도 잘 생긴 홍성철(洪性徹) 대령을 비서실장으로 계속 유임시켜 가톨릭 신자인 장면 총리의 측근인사들과 그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9월 중순경 장면 총리의 제주도 초도순시 일정이 지상에 보도되자 나는 동해안에서 실시될 예정으로 있던 사단 수색중대의 상륙정찰훈련을 장 총리의 제주도 초도순시 일정에 맞추어 제주도에서 실시할 복안을 세우는 한편 총리실에 건의하여 장면 총리를 그 훈련장의 관망대에 모실 계획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계획이 성안이 되기에 이르렀는데, 계획의 골자는 이러했다.
즉 상륙정찰훈련의 D일은 장 총리의 제주도 초도순시일 하루 전날로 정했던 나는, 그 D일 하루 전날에 장 총리를 서귀포 관광호텔로 모시고가서 저녁식사를 대접하는 자리에서 감군과 관련된 간곡한 진언을 할 작정이었고, 그 다음 날 아침 장 총리를 중문(中文) 해안에서 실시되는 훈련장 관망대로 모시고 가서 훈련을 참관하시게 한 다음 오찬을 대접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사정이 허락하게 되면 장 총리를 제주읍까지 모시고 가서 그해 4월 제주읍 동문로터리에 건립된 해병혼탑(海兵魂塔)을 장 총리에게 소개하고 헌화를 할 계획이었다.
내가 장 총리와 몇 분의 측근인사들을 모시고 미 공군 C-46기 편으로 제주도로 출발했던 날짜는 9월 20일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그때 장 총리를 수행했던 인사들은 권중돈(權重敦) 국방장관과 공보비서 송원영(宋元英)씨, 총무처장관 정헌주(鄭憲柱)씨, 국토건설본부장 장준하(張俊河)씨 등이었다.
제주공항에서 성산포를 거쳐 서귀포로 가는 도 일주 도로는 포장이 돼 있지 않아 노면이 고르지가 못했고, 서귀포에 있던 관광호텔은 명색이 관광호텔이긴 했지마는 시설물이 너무나 허술하고 보잘것 없어 마루가 깔려 있는 비좁은 기억자형 목제 복도는 마치 TV방송국의 셋트처럼 걸음을 걸으니 삐그덕 삐그덕 소리가 나고 서쪽에서 바람이 불게 되면 바람이 그대로 방안을 휩쓸고 갈만큼 엉성한 단층 목조건물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당시 국내에 있던 관광호텔은 서귀포와 불국사와 설악산 등 세 군데 밖에 없었고, 모두가 같은 수준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호텔에 총리 일행을 모시고 저녁식사 대접도 하고 함께 숙박을 하게 된 나는 바로 이 기회가 나에게 주어진 천재일우와도 같은 기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설레이기까지 했다. 그 자리에는 나와 홍성철 비서실장 외에 해군 함대사령관 김영관 소장과 제주지구 위술사령관(해군경비부 사령관)도 동석을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그 훈련에는 함대사령부에서 지원한 10여척의 LCM이 동원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분명히 기회는 주어졌지만 막상 의중(意中)의 진언을 하자니 좌중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무거워 망설여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술·담배를 전혀 즐기지 않는 장면 총리의 근엄한 인품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장 총리의 근엄한 인품 때문에 좌중의 분위기가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따라서 나로서는 재미없는 그 무거운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가벼운 분위기로 전환시킨 연후에 그런 기회를 포착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속으로 묘책을 궁리하고 있던 나는 회식을 하는 도중 실례가 되는 줄을 알면서도 간혹 내가 술자리에서 꺼내기를 좋아하는 두 토막의 우스게소리 가운데 강도가 조금 약한 쪽부터 먼저 꺼내어 분위기의 전환을 시도해 본 다음 약간의 돌파구가 생기면 즉시 강도 높은 얘기로 승부를 가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어려운 결심을 하고 회심의 공작을 시도해 본 나는 내가 느끼기에 장 총리께서는 저 사람 해병대사령관이란 자가 속되게 저런 얘기를 하는 것일까‥‥?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직감적인 판단으로 잘 먹혀 들지 않는구나 하는 느낌을 가졌으나 그렇다고 기왕에 시도한 노력을 중단시킬 수가 없어 휠씬 강도가 높은 얘기를 꺼내었더니 그제서야 그 어른도 목석(木石)은 아니었던지 "흑·.·" 하며 웃음을 터뜨렸고, 그 분의 입가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자 좌중에선 이내 웃음소리가 폭발하여 졸지에 분위기가 돌변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분위기의 전환에 성공했던 나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총리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진언을 했다.
즉 국가정책상 10만의 국군을 감축하려는 정부의 노력을 이해한다고 전제한 나는, 한·미 해병대가 수훈을 장식했던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상기시키면서 유사시에 국가전략기동부대로서 빛나는 역할을 충성스럽게 수행할 해병대의 임무와 존재를 강조한 연후에 열근의 고깃덩어리를 떼냄에 있어서 그 고기를 황소의 넙적다리에서 떼내어야지 만약에 참새의 다리에서 떼낸다고 한다면 참새는 제대로 건강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니 부디 해병대를 감군대상에서 제외시켜 주십사고 간곡히 진언을 한 것이었다.
그날 밤 시설이 허술했던 서귀포 관광호텔에서 일박을 했던 장면 총리일행은 그 다음날 예정대로 특별히 마련된 중문(中文) 해안의 훈련관망대에서 해병대의 특수훈련을 참관하고 그날 오후 제주읍에 도착한 후에는 나의 안내로 동문로터리에 건립되어 있는 해병혼탑에 헌화를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제주시 중심가에 세워져 있는 해병혼탑은 6·25전쟁 때 해병대에 지원입대한 3천 학도병들이 조국과 모군의 역사를 빛낸 그 구국의 투혼을 상징하는 것으로 고철수, 문상률, 김병근 씨 등 몇몇 제주출신 예비역 해병동지회 간부들과 제주출신 해군군의관 장시윤(예비역장교) 씨 등의 발기와 해병대사령부의 예산 지원으로 건립이 되었고, 당시의 제주 해병막사장 이서근 대령이 탑의 설계도 하고 공사를 감독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감군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해병대의 병력을 감축시키지 않으려고 했던 나의 노력은 물론 반드시 그런 의도와 결부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후에도 변함없이 지속되어 같은 달 28일 김포에서 실시된 '횃불작전'때는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를 함께 관망대에 모시게 되었고, 그해 10월 8일 영일만에서 실시된 원자탄 상황하의 사단급 상륙전훈련인 '단풍작전'때는 장면 총리를 훈련장의 관망대에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쳐 그 해 11월 16일에는 초도순시차 해병대사령부를 방문한 장면 총리를 맞게 되었는데, 그 초토순시 때에는 송원영, 장준하씨 등의 수행원 외에 측근자의 한 사람인 김철규 신부(神父)도 동행을 했었다.
한편 경제건설을 위해 10만의 병력을 감축시키려고 했던 장면 정부의 감군노력은 그 노력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한·미간의 갈등이 빚어져 육군참모총장의 경질을 가져오게 했다.
갈등을 및게 된 당사자들은 미국의 대외군원국장으로 있던 파마 대장과 육군총장 최경록 중장이었다. 이들이 갈등을 빚게 된 것은 파마 대장이 한국의 안보를 이유로 한국 정부의 감군정책에 반대의사를 표명한데 대해 최경록 총장이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내정간섭 운운하는 발언을 하여 파마 대장의 간섭을 비난했던 것이며, 주한 유엔군사령관 메그루더 대장이 한국안보를 위한 건설적인 충고를 받아들이라는 발언을 하는 등 한·미 고위장성들 간에 약간의 갈등이 빚어져 정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최경록 총장을 경질시키고 말았다. 뒤에 언급이 되겠지만 그때 후임 총장으로 기용된 사람이 곧 5·16 군사정변 때 군사혁명위원회의 의장으로 추대된 2군사령관 장도영 소장이었다.
그런데 장면 정부의 10만 감군정책은 결국 미국 정부의 반대로 그해 12월 하순경 3만명을 감축한다는 말이 있었으나 바로 그 무렵 장면 총리는 총리실로 소집한 군 수뇌부 요인들에게 10만 감군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미국 정부를 방문하고 돌아온 김영선(金永善) 재무장관의 방미결과를 설명하면서 미국 정부의 반대로 목적을 달성하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그때 김영선 장관으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한국의 안보를 위해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필요한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있는 미국 정부로서는 만약에 한국 정부에서 10만 병력의 감축으로 방위력을 약화시키려고 한다면 간접군원인 PL-480호에 의한 무상식량원조를 그만큼 줄이겠다고 하는 바람에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날 총리실에 소집이 되었던 군 수뇌부 요인들은 현석호 국방장관을 위시해서 최영희 연합참모본부장, 이성호 해군총장, 김창규 공군총장과 해병대사령관 등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해병대 사령관 글 > 4대사령관 김성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방의 멍에 - 19. 海兵隊 司令官 時節 (4) 5·16 軍事政變 (0) | 2014.09.06 |
---|---|
국방의 멍에 - 19. 海兵隊 司令官 時節 (3) 不運했던 李熙晶 提督 (0) | 2014.09.06 |
국방의 멍에 - 19. 海兵隊 司令官 時節 (1) 憲法守護 宣誓式 (0) | 2014.09.06 |
국방의 멍에 - 18. 사단장 시절(師國長 時節) (9) 海鷹作戰과 許政首班 (0) | 2014.09.03 |
국방의 멍에 - 18. 사단장 시절(師國長 時節) (8) 金東河 將軍의 辭任事件 (0) | 2014.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