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설기 - 해병대의 ‘오모노’ 한예택 대령
해병대 장교들 중에서 육군초등군사반 2기로 입교(50년 2월)했던 사람은 김종식 한예택 박성철 김낙천 황영씨 등 5명이었고, 이들 중 김종식 중위는 학생장, 한예택 중위는 부학생장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먼 훗날 한국군의 파병이 단행되어 수년 간 월남전쟁이 계속되고 있을 때 주월한국군사령부를 방문했던 육사8기 출신의 조 모 대령(초등군사반 2기생)은 초등군사반 2기 부학생장이었던 그 한예택씨가 남방셔츠 바람으로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중장의 집무실 탁자 위에 구둣발을 얹어 놓은 자세로 채명신 사령관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곤 속으로 초등군사반 때 ‘사이고 타카모리(西鄕隆盛)’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저 양반 정말 ‘오모노(일본말-큰 인물)’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또 그런 이야기를 현역 때 모 기관에서 함께 근무했던 해병대의 정 모 중령에게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25년 북만주에서 태어나(부모의 고향은 함경도) 만주(하얼빈) 대도관중학(일본인 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생업에 종사하다가 조국의 광복을 맞이했던 그는 김성은 전 국방장관을 비롯, 김종식 박성철 백남표 김낙천 정세웅 정봉익씨 등 대도관중학교 선후배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고려자위대(高麗自衛隊)의 부령(단장 부관)으로 선발되어 환국하기 위해 피난민 수용소가 설치된 금강보통학교(하얼빈 소재 조선인학교)로 몰려드는 북만주 일대의 조선인 피난민을 (무장을 하여) 보호하는 한편 소련 점령군 당국과 교섭하여 그들을 수차에 걸쳐 철도편으로 신의주까지 호송하는 자위단의 임무를 수행했고, 귀국 후에는 박성철씨 등과 함께 돈암장에서 이승만 박사에 대한 경호임무를 수행하다가 46년 2월 15일 가까운 동지들과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에 입대, 소정의 신병교육 과정을 거쳐 간부요원(준사관)으로 임명되어 실무에 종사하다가 48년 해사특교대를 수료하고 소위로 임관했는데, 준사관으로 있을 때 한국인 헌병대의 전신인 SP에서 근무하며 군 내부에 침투한 공산 프락치의 색출을 위해 활약했던 그는 해군 내의 일부 세력이 손원일 단장이 미 군정청 고문관 뽀뽀비치 대위와 교제를 하기 위해 간혹 댄스파티를 여는 것에 불만을 품고 손 단장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자 손 단장의 보호를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했고, 또 해사특교대에 입교하기 전 군산기지에서 근무할 때는 이런 일화를 남겼다.
즉 곰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대범하고 우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는 어느 날 시내 모 요정에서 술을 마신 박 모 상사와 김 모 상사가 요정 밖에서 시비가 벌어져 험상궂은 분위기가 조성되자 싸움을 말릴 생각으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것이 화근이 되어 총신이 긴 모젤권총을 뽑아 든 박 상사가 “저리 비켜, 비키지 않으면 쏴버리겠어!” 하고 소리치자 설마 쏘랴는 생각에서 “쏠테면 쏴 봐” 하고 대어들 듯이 말하는 순간 ‘쾅’하는 소리와 함께 발사된 총탄이 자신의 왼쪽 허벅지를 관통하자 미련스럽게 “어? 정말 쐈어??” 하곤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지혈을 하려 하기에 동료들이 급히 차에 싣고 병원으로 갔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해도서부대장 재임 시에 MI소총으로 여러 마리의 해표(바다표범 수컷)을 잡긴 했으나 삽시간에 후방지역으로 소문이 퍼져 윗분 들로부터의 전화가 사방에서 걸려오는 바람에 단 한 마리의 해표신도 먹어 본 적이 없었던 그는 한 번은 사살한 해표의 신을 안전하게 말리기 위해 헌병대 초소막 기둥에 매달아 놓았다가 누군가가 예리한 칼날로 신의 끄트머리 부위를 살짝 베어 가는 절취사건이 발생하자 헌병대장에게 범인을 색출하라고 엄명을 내린 끝에 그 날 초소에 들였던 몇 안 되는 출입자들 체크하던 중 뜻밖에도 잠시 초소에 들린 적이 있는 정훈관 황 모 소위가 자복을 하며 용서를 구하자 “먹으면 다 먹지 왜 끄트머리만 살짝 베어 먹었지?”하곤 가벼운 빳다로 다스린 다음 “써먹어 보고 신통한 효험이 있거든 인사나 해”하고 말했다고 한다.
5.16직후 김동하 장군의 전화연락을 받고 상경했던 한예택 대령은 김동하 장군을 찾는 전화가 어떻게나 걸려오는지 김 장군과 모 호텔 밀실로 잠적해서 하룻밤을 지낸 다음 김 장군의 안내로 육군본부에 위치한 박정희 장군(국가재건 최고회의 부의장)의 집무실을 방문했더니 박 장군은 김동하 장군이 “박 의장님, 바로 이 사람이 한예택 대령입니다.” 하고 소개하자 얼마나 믿음직스럽게 보였던지 두 번이나 악수를 청하며 잘 부탁한다는 말을 했다고 하며, 박 장군과 인사를 나눈 다음 김 장군과 헤어질 때 한예택 대령은 김 장군에게 “국민에게 캄풀주사를 놓았으면 됐지 최고위원인지 뭔가 하는 벼슬을 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고 육군에서 이한림 장군을 잡아가듯이, 누군가가 김성은 사령관을 해칠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벌어지면 나는 김 장군을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거요” 라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과묵하고 통이 큰 사람으로 알려져 있던 한예택 대령은 보급정비단장 재임 시 폐품화된 LVT 엔진을 재활용하여 3척의 보트를 제작하여 서울(사령부)과 진해(교육단) 포항(사단)에 한 척씩 보내어 유용하게 쓰도록 했는데, 포항으로 보낸 그 배를 사단장 고길훈 소장이 하필이면 현충일에 형산강에서 시승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해임을 당하자 고 장군을 견제하려는 소인배 같은 사람들을 원망하며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62년 6월 1일 부로 준장으로 승진하게 돼 있던 한예택 대령이 그 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2등병으로 강등되어 불명예 제대를 하게 되었던 것은 보급정비단에서 보유하고 있던 비자금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김동하 장군이 알라스카 소탕전에 걸려 옥고를 치렀듯이 김동하 장군과 가까웠던 한예택 대령도 그를 제거하려는 군 내부의 비정한 견제세력에 의해 제거가 되었다는 소문이 전해지고 있었고, 누가 만들어 주었는지는 몰라도 그는 모자와 옷깃에 달 만든 별 계급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군복을 벗은 후 대단한 뱃짱과 배경을 지니고 있었던 한예택씨는 사업을 위해 월남으로 갈 때 김성은 국방장관 보좌관 홍일승 대령의 주선으로 여권없이 해군함정에 승선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중장과 친분이 두터운 대도관중학교의 동문 소개로 채명신 사령관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던 그는 차츰 채 사령관과 교분이 두터워진 상태에서 채 사령관의 집무실 탁자 위에 구둣발을 올려놓고 담소를 나누게 되자 특히 육군장교들의 눈에 대단한 ‘오모노’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년 전 지병으로 타계한 고인은 생전에 대한중앙경비보장회사의 관리부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모군 출신 후배들의 취업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1 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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