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설기 - 삼국지의 영웅들을 동경했던 진두태 소위
49년 12월 28일 진해에서 제주도로 이동했던 해병대는 그 이듬해 2월부터 6.25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부여된 임무 중의 하나인 한라산의 공비(共匪) 토벌전을 벌였다. 그때까지 한라산에 남아 있었던 공비들의 잔존 세력은 약 100명 가량으로 추산되고 있었고, 그 나머지 세력은 4.3사건(48년 4월 3일 남로당 전남 도당위원회 산하 군사부 직계 하의 이른바 제주인민해방군이란 조직체가 주동이 되어 제주읍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일으켰던 폭동사건) 후에 전개된 군(육군)경 합동 토벌대에 의해 소탕되고 말았다.
공비 토벌에 투입된 해병대의 병력 중 서정남 소위가 지휘한 3개 분대의 932부대(사령부 정보참모실 소속 수색대)는 한라산 및 그 서쪽 오백장군(五百將軍)과 세오름(三岳) 돌오름(石岳) 일대를 담당했고, 모슬포부대(945부대)의 토벌대는 한라산 상봉과 그 서쪽 일대를 담당했다.
산세가 험한 한라산에는 천연동굴과 인공적인 동굴이 많았을 뿐 아니라 심한 풍설(風雪)과 강우 등 불순한 일기 때문에 공비를 토벌하는 데에는 많은 애로가 수반되었다. 공비들은 일제 때 개설한 ‘하치마키’ 도로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4개처에 지형지물을 이용한 좀처럼 눈에 띠지 않는 은밀한 초소(哨所)를 설치하여 아군 토벌대가 접근해 가면 민첩한 신호로 잠적을 해 버리는 바람에 그들을 찾아 내거나 추적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아군 토벌대는 한 곳으로 몰려 다니는 까마귀떼를 보고 공비들의 동태를 짐작하기로 했고, 때로는 공비들이 방분(放糞)한 고약한 악취를 맡고 그들의 잠복처(아지트)를 은밀히 급습하는 방법으로 그들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전술을 구사했는데, 까마귀떼가 몰려 다니는 곳에서는 공비들이 도륙한 야생 우마(牛馬)의 지체가 버려져 있거나 썩고 있는 악취가 품기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별히 소개하고자 하는 사람은 3개 분대로 편성된 932부대의 제1분대장이었던 진두태 병조장(상사)의 무인(武人)다운 기개와 경악할 기행(奇行)과 관련된 얘기 이다. 그는 과거 일본 해군에서 복무할 때(지원병 2기) 일본어로 연역(演譯)한 삼국지(三國誌)를 몇 십 번을 읽었는지 알 수 없으나 중요한 대목을 휑하니 외우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어느 누구보다도 그 책에 등장하는 맹장(猛將)들의 풍모와 언행, 그리고 그들이 전장을 누비면서 남긴 숱한 무용담을 동경했던 사람으로 전해지고 있는데(같은 일본 해군지원병 출신인 이원경씨의 증언에 따름) 그가 남긴 경악할 소행이란 다음과 같다.
즉 삼국지에 등장하는 그 무장(武將)들의 무용담 중 특히 혈풍(血風)이 휘몰아치는 전장에서 전광석화(電光石火)와도 같이 단칼에 쳐서 떨어뜨린 선혈이 뚝뚝 듣는 적장의 목을 말안장에 매달고 의기양양 진터로 달려오는 장면을 동경했던 그는 마치 자신이 적장의 목을 벤 그 무장(武將)으로 착각을 하거나 자신이 사살한 공비를 적장으로 착각한 것처럼 자신이 차고 있던 일본도(日本刀)로 그 공비의 목을 벤 다음 그것을 과일상자에 담아 썩지 않게끔 소금에 저렸고, 그런 연후에 사령부로 가지고 가서 윗분 들에게 보임으로써 섬찟한 느낌을 갖게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한 연후에는 조조(曺操)가 덫(함정)에 빠뜨려서 사로잡은 관우(關羽)의 목을 베어 큰 소금통에 담아 유비(劉備)의 진영으로 보내어 장례를 치르게 했던 것처럼 과일상자에 담긴 그 공비의 목을 한라산으로 가지고 가서 공비들에게 전해 주려고 했으나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상자를 한라산 기슭의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그와 같은 전설적인 화제를 남긴 그 한라산의 기인 진두태 상사는 그 후 해간 3기로 임관, 51년 1월 2대대 S-2로 임명되어 해병제1열대가 육군 3군단에 대한 작전을 지원했던 그 영월 정선 평창지구 전투에 참가했는데, 그 전투기간 중 그는 자신의 생일이었던 3월 7일 수명의 대원을 이끌고 하진부리 남쪽에 있는 박지산(博芝山) 일대의 적정 탐색에 나섰다가 “따쿵!”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온 적탄에 미간(眉間)을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그 날 아침 대대본부 벙커에서 아침식사를 같이 했던 5중대장 김익태씨(해간 3기.932부대의 분대장 중의 한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그 날 오후 멍석말이를 하듯 담요에 싸서 대대본부로 운반해 왔던 그의 시신을 보니 군복과 군화를 홀랑 벗긴 인민군들이 그의 알몸을 얼마나 끔찍하게 난자했던지 참아 뜬눈으로 볼 수 없는 상태였다고 했다.
그리고 과거 일본 해군에서 함께 복무했던 김연상 장군(제2대 청룡부대장역임.작고)이 필자에게 한 말에 따르면 그가 맞이했던 그러한 최후는 일제 때 전쟁터에서 아무리 적탄이 빗발쳐도 절대로 허리를 굽히지 않고 겁이 없이 용감하게 서서 전진했던 그의 무인다운 기개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고인은 95년 전쟁기념관에서 호국의 인물로 현양 되었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1 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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