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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기('50년) - 최초의 전투부대지휘관 고길훈 장군

머린코341(mc341) 2015. 3. 22. 14:36

6·25전쟁기('50년) - 최초의 전투부대지휘관 고길훈 장군

 

50년 7월 13일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대사령부에서는 고길훈부대로 명명(命名)된 3개 중대로 편성된 전투부대(병력 300여 명)를 군산으로 출동시켰는데 이 부대가 6.25전쟁기간 중 해병대에서 출동시킨 최초의 전투부대였으며, 또한 이 부대가 치른 전투가 6.25전쟁기간 중 해병대가 치른 최초의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1923년 함남 영흥에서 출생하여 경복고보(서울)를 거쳐 일본 명치대학 재학 중 조국의 광복을 맞아 건군(建軍)기에 설립된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46년 조선경비대(육군의 전신) 간부로 입대했다가 해안경비대(해군의 전신)로 전보된 후 49년 2월 제2대 인천기지사령관을 역임한 신현준 사령관이 해병대사령관으로 임명되자 해병대로 전입, 대위의 계급으로 창설기에 편성된 해병대의 제1중대장을 역임했고, 그 후 해병대가 제주도로 이동한 후에는 사령부정보참모로 근무하다가 6.25전쟁의 발발로 명에 의해 고길훈부대로 편성된 최초의 전투부대를 지휘하여 군산으로 출동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으로 명명(命名)된 그 최초의 전투부대를 지휘했던 고길훈 소령은 7월 15일 아침 군산에 상륙함과 동시에 자신에게 부여된 작전명령(군산항에 쌓여 있는 일본 수출용 미곡을 당국에서 후방지역으로 반출하는 작업을 엄호하라는 명령)을 시행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조치들을 취하였다.

 

즉 군산경비부를 통해 해군본부에 타전하여 낡은 99식 소총(단발소총)으론 싸울 수가 없으니 MI소총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던 그는 16일 수색소대를 장항으로 도강시켜 적정을 수집하게 한 연후에 17일 아침 10여 척의 목선을 징발하여 1.2중대를 장항으로 진출시켜 예측할 수 없는 정정에 대비시켰다가 그 날 오후 약 1개 대대의 적이 대천(大川)방면으로부터 내도하자 그 적을 장항 북방 고지에서 요격한 후 아무런 통신장비도 갖지 못한 여건 하에서도 별다른 혼란 없이 병력을 군산으로 철수시켰고, 또 18일에 이르러 적이 군산을 남동북으로 포위할 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자 서해지구전투사령부 참모장 원용덕 준장의 요청에 따라 19일 육군의 철수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3중대를 이리(裡里)로 급파한 데 이어 20에는 군산 철수를 단행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바로 그러한 와중에 해상에서 접촉한 군산경비부 소속 장교로부터 해군본부에서 타전한 다음과 같은 작전명령, 즉 ‘MI소총을 보냈으니 군산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던 고길훈 부대장은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분명히 MI소총을 요청한 사실은 있었지만 그 소총이 도착도 되지 않았을 뿐더러 설사 도착이 되었다 손치더라도 원자탄도 아닌 그 소총을 믿고 이미 선적이 돼 있는 각종 장비와 군수품을 하선시키는 한편 장병들을 다시 군산에 상륙시킨다는 것은 마치 화약을 잔뜩 지고 불 속에 뛰어 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고길훈 부대장은 결과는 사후에 보고키로 하고 미곡이 적재된 LST 안동호에 승선하여 3중대 대원들이 도착할 목포항을 거쳐 여수항으로 철수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이지 여수항에는 고길훈 부대장과 임무를 교대할 김성은 중령이 1개 중대의 보충병력을 대동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길훈 부대가 군산에 상륙한 지 7일만에 이루어진 그 전투부대 지휘관의 임무교대, 그것은 그 이유가 군산을 사수하라는 그 명령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길훈 부대장으로서는 무운(武運)도 따르지 않았지만 지극히 유감스러운 인사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그 후 104고지 전투 때 1대대를 지휘했던 고길훈 소령은 1대대가 적 주저항선의 외각전초고지인 104고지를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300~500미터 너비의 개활지를 사이에 둔 연희고지(적주저항선)을 공격하는 과정에서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공격을 중단하고 미 해병5연대의 예비대인 2대대가 투입되어 이틀 후인 9월 25일에 이르러 마침내 연희고지 일대를 점령함으로써 서울 시가지에 돌입할 태세를 갖추게 되었었다.

 

 한편 서울 수복(9.28) 다음날(9.29) 중앙청 메인홀에서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와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환도식이 거행되었을 때 한국군 장교로서는 유일하게 그 식전에 참석했던 고길훈 대대장은 맥아더 장군의 연설이 계속되는 동안 초연에 그을린 홀 천장에서 사그라진 유리 한 장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침착한 행동으로 자신이 쓰고 있던 철모를 이 대통령에게 씌워드려 주목을 끌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행사장에 고길훈 소령이 참석하게 되었던 것은 그 행사를 주관한 미 해병5연대장의 명령에 따라 1대대가 중앙청 내부에 대한 경비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며 1대대가 배속된 그 5연대는 미 1사단의 작명에 따라 중앙청 일대를 점령한 수훈의 부대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북진기간 중 고성지구와 원산지구 전투에 참가했던 고길훈 부대장은 원산에서 80리 북방에 있는 고향 영흥에 양친이 생존하고 있었지만 사사로운 일 때문에 막중한 군사작전에 누를 끼칠 수가 없어 마음 속으로 불효를 탄식하며 용서를 빌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해병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51년 여름철)고 장군은 자신이 발굴한 미들급 권투선수 송방헌씨를 해간5기로 입관시켜 해병학교에서 훈련을 하게 하여 미들급 참피언으로 등극하게 했고, 장이진 장문경 김형익 이경운 이봉길 임계삼씨 등 농구선수들을 장교 또는 문관으로 확보하여 농구부를 발족시킴으로써 그 후 약 10년 간 무적의 강팀으로 이름을 떨치게 했었다.

 

전쟁기간 중 포병대대를 창설하여 초대 포병대대장을 역임했던 고길훈 장군은 무운처험 관운도 따르지 않은 편이었다. 사단장 시절에는 보급정비단장 한예택 대령이 폐품화된 LYT 엔진을 재활용하여 제작한 소형 보트를 하필이면 현충일에 형산강에서 시승한 것이 화근이 되어 임기를 반도 채우지 못한 채 해임을 당했고, 부사령관 재임기간 중 5.16 군사쿠테타가 일어났을 때는 그 거사에 대한 지지를 하지 않음으로써 정적과 같은 견제세력들에 의해 밀려나 소장의 계급으로 예편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무운과 관운이 따르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의롭고 결백한 신조를 지켜온 군인으로 알려져 있는 고길훈 장군은 예편 후에 임명된 4년 임기의 토지개량조합연합회장(마사회와 함께 비자금 등으로 말썽이 많았던)의 임기를 전임회장들처럼 중도하차 하듯 경질되지 않고 처음으로 온전하게 마친 공인다운 공인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고 장군의 동향인들 말에 따르면 그를 한 신(韓信)장군과 쌍벽을 이루는 영흥 출신의 결백한 인물로 평하고 있다고 한다.

 

81년 향년 60세를 일기로 타계한 고길훈 장군은 전쟁기념사업회에 의해 금년 2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어 전쟁기념관에서 유덕을 기리는 현양식이 엄숙히 거행되었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1 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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