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기('50년) - 성기에 부상을 입은 이상필 해병
6․25전쟁 때 해병대가 처녀출전했던 군산․장항지구 전투 때 2중대 (장, 김광식 중위) 1소대 소총병이었던 이상필 해병은 장항(長項)서북방의 최전방 야산지대에 배치되어 있던 2중대 장병들이 돌연 출현한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을 견제하며 1중대(화기중대)의 엄호 하에 그 날 (7․17) 아침 군산에서 장항으로 건너갈 때 타고 간 목선에 분승하여 다급하게 군산으로 철수할 때 하필이면 빗발치는 유탄(적탄)에 성기(性器)의 두부(일명 용두)에 부상을 입는 바람에 그날 밤 숙영지인 군산 해양대학에서 숙영을 하는 동안 그런 소식을 전해 들은 전우들이 “하필이면 왜 그 물건을 다쳤지?” “그래가지고서 우째 장가를 가겠노?” 하며 안스러워했고, 어떤 대원은 “저주 받아야 할 적탄이군 그래” 하며 이를 갈기도 했다.
그런데 지극히 드문 부위에 부상을 입고 진해 해군병원으로 후송이 되었던 이상필 해병은 다음과 같은 일로 진해 병원이 생긴 이래 가장 익살스러운 화제를 남긴 특이한 환자로 기억되고 있는 유명인의 한 사람이다.
즉 그는 어디서든 간호장교를 보기만 하면 붕대가 감긴 그 물건을 쳐들어 보이며 빨리 낫게 해 달라고 졸라대는 바람에 간호장교들로 하여금 학(瘧)을 떼게 했고, 그러던 어느날 진해병원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성기에 붕대를 감고 누워있는 특별한 환자를 보고 앞날이 걱정되었던지 “저 사람 앞으로 써먹을 수 있겠나?” 하고 옆에 서 있는 병원장(김기전대령) 에게 물었을 때 그는, 마치 그러한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병원장이 미처 답하기도 전에, 벌떡 병상에서 일어나 앉으며, 힘찬 목소리로 “각하, 문제 없습니다!”라고 대답함으로써 그 병실을 폭소의 도가니로 환하게 했다는 후일담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화제의 주인공 이상필 해병은 그가 장담했던 대로 과연 그 생민지기(生民之器)를 잘 써먹을 수 있었던 것일까? 이러한 궁금증에 대해 혹자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결혼을 해서 5남매를 두었다고 했고, 혹자는 성 불구가 되었을 텐데 어떻게 장가를 갈 수 있었겠는가 하고 말하기도 했으나 필자가 ‘해병대의 전통과 비화’를 쓸때(2000년) 믿을만한 소식통(그의 동기생)이 있어 알아보았더니 부산에서 거주하고 있는 그는 분명히 결혼은 했으나 슬하에 자녀가 없다고 했고, 자식이 없어 대(代)가 끊길까 걱정을 하고 있다는 말도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1 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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