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20. 國防部長官 時節
(2) 3·16 성명과 4·8 성명
한편 내가 국방장관으로 취임했던 바로 그날 박정희 의장은 정치인들의 정치활동 금지를 포함한 4년간의 군정연장을 국민투표에 묻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3·16성명을 발표하여 정가에 충격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키 게 했다.
2월 27일 민정에 불참하고 원대복귀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던 박 의장이 돌연 약속을 깨뜨리고 그러한 성명을 발표하자 미국 정부에서는 PL480호에 의거 한국으로 보내고 있던 무상원조식량을 실은 배를 파나마 운하에서 회항(回航)시키는 조처를 취함과 동시에 주한 미국 대사로 하여금 한국의 군사정부에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도록 했다.
그리고 박 의장의 2·27선서가 3·16성명으로 선회하자 국내의 재야 정치인들은 3·16성명의 철회를 요구하며 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정국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사태가 그러하자 박 의장은 나에게 이런 지시를 했다. 즉 3군 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을 대동하고 버거 대사를 방문하여 4년간이라고 발표는 했지마는 가급적이면 그 시기를 단축하여 민정 이양을 하고 원대에 복귀할 것이니 3·16성명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표명은 유보해 달라고 요청하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지시를 받은 나는 미국 대사관에 면담요청을 한 결과 미 8군사령부에서 회동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기에 각 군 총장과 해병대사령관과 함께 그곳으로 갔더니 그곳에는 버거 대사와 하비브 참사관, 주한 유엔군사령관(8군사령관 겸임) 멜로이 대장과 부사령관 마이어 중장 등이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한데 그 자리에서 박 의장의 뜻을 전하고 협조를 요청했더니 버거 대사는 안색을 바꾸며 "2·27선서를 번복하다니 말이 되느냐" 고 하면서 당장에 그 성명을 철회하지 않을 경우 식량 뿐 아니라 유류와 탄약 등 한국군에 제공하고 있는 군사원조도 일체 중단하겠다고 했다.
8군사령부를 물러나온 나는 그 길로 청와대로 가서 박 의장에게 버거 대사를 만난 결과를 보고하고 사태수습에 대한 의견교환을 했으나 이렇다 할 묘안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때 나와 함께 8군사령부로 동행을 했던 군부 요인은 육군참모총장 김종오(金鍾五) 대장과 해군총장 이맹기 중장, 공군총장 장성환 중장, 해병대사령관 김두찬 중장 등이었다.
3·16성명으로 대미관계가 극히 악화되고 국내 정국의 혼란이 가열되자 최고회의에서는 3월 21일 3·16성명을 3월 말까지 보류하는 것을 전제로 한 재야 정치지도자들과의 회담을 제의했으나 윤보선, 장택상, 이범석, 김도연씨 등 재야 정치지도자들이 그 제의를 거절하고 3·16성명을 철회시키기 위한 범국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3월 21일 오전 11시 종로에 있는 백조클럽에서「民主救國宣言大會」를 개최하고 군정연장을 절대로 반대한다는 등의 플레카드를 내걸고 데모에 돌입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야정치인들이 심상찮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던 3월 21일 오후 2시경 나는 최고회의 외무·국방위원장 김희덕(金熙德) 장군의 방문을 받았는데, 그는 오월동지회(五月同志會)니 반혁명음모사건 등으로 심한 분열상을 빚고 있는 혁명주체 최고위원들의 실패를 개탄하며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즉 혼란된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최고회의와 최고위원들에 대한 방관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각 군 지휘관들의 단합된 모습을 보여 주는 행동이 있어야 되지 않겠냐고 했다.
얼핏 느끼기에는 일종의 제안같이 여겨졌던 그의 그러한 말이 김희덕 위원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만은 아닌듯한 느낌이 들었던 나는 5·16후 혁명의 이름으로 하극상을 자행하며 안하무인격인 행동을 자행했고, 또 그러면서도 내부적으로 심한 갈등을 빚어 왔던 혁명주체 최고위원들의 행태에 대해 스스로 비판을 가한 그의 솔직한 심정에 공감을 하면서 이런 기회에 국방부에서 전군의 비상지휘관회의를 소집하여 국가의 안전을 바라는 군의 진로와 굳건한 결의를 천명하고 단합된 모습을 과시한다면 박 의장에 대한 전군의 지지를 보내는 고무적인 계기를 조성하게 됨으로써 시국 수습과 사회 안정을 위해서도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게 될 것이고,
또 국내외적인 저항에 부딪혀 노심초사하고 있는 박 의장의 소신있는 결단을 밀어 주는 강력한 뒷받침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어 김희덕 위원과 상의해서 그날 오후부터 각 군의 모든 비상연락망을 총가동하여 각 군별로 비상지휘관회의 소집을 위한 통고를 하게 한 끝에 그 다음날 오전 11시 예정된 시각에 국방부 회의실에서 내 자신이 직접 주재한 전군 비상지휘관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다.
그날 아침 종로에 있는 백조클럽에서 수백명의 재야정치인들이 모여「민주구국선언대회」를 열고 있던 그 시각에 진행이 된 전군 비상지휘관회의는 군의 단합과 진로를 다지는 준비된 결의문을 채택한 다음 그 회의에 참석한 모든 지휘관들(장성급)이 각자의 서명을 하는 순서로 진행이 되었는데, 회의가 끝난 직후 나는 3군 수뇌가 배석한 별도의 자리에서 기자회견을 가지고 "공산침략을 분쇄할 수 있는 현 정부를 강력히 지지한다. " "혁명과업은 기어코 완수되어야 한다." "군의 단결을 저해하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할 수 없다." "현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3·16성명에서 밝힌 바 있는 국민투표의 실시를 절대 지지한다." 고 천명했다.
그리고 기자회견이 끝난 후 그 회의에 참석했던 160명의 각 군 주요 지휘관들은 장관 승용차를 선두로 별판이 붙은 90여대의 승용차와 지프차에 승차하여 퍼레이드를 하듯이 서울역 건너편에 있던 국방부 청사로부터 서울역전과 남대문 및 태평로와 세종로를 거쳐 청와대로 향했다.
그리하여 청와대에 도착했던 나는 각 군 수뇌부가 배석한 가운데 박정희 의장에게 160명의 각 군 지휘관들이 서명한 그 결의문을 제출함으로써 난국타개를 위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박 의장에게는 큰 함과 용기를 주고 재야정치인들과 국민들에게는 정국의 안정과 혁명과업의 완수를 바라는 군의 단합된 모습을 과시했는데, 결과적으로 정국의 안정을 바라며 연출했던 그 비상처방은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졌었고, 또 비상지휘관회의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버거 대사와 유엔군사령관 멜로이 대장도 박정희 의장과 군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갖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한편 재야정치인들의 구국선언대회와 3·16성명 철회 데모 등으로 인해 과열이 된 정국의 혼란은 3월 17일에 개최된 최고회의측과 재야정치인들이 합석한 시국수습회의와 4월 초 청와대에서 개최된 3차에 걸친 조야실무자(朝野實務者) 회의를 거친 끝에 재야측에서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안을 철회하면 12월 26일까지 군정을 연장하는데 동의하겠다는 제의를 한 것이 완충적인 절충안이 되어 결국 4월 8일 발표된 박 의장의 4·8성명으로 마침내 정국의 타국을 모면하고 정치발전에 중대한 계기를 조성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쌍방의 입장을 일보씩 후퇴시킨 그 4·8성명은 3·16성명에서 천명했던 개헌국민투표를 9월 중에 실시하든지 개헌헌법에 의한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든가를 협의 결정한다는 내용과 정치활동을 허용하여 모든 정당의 체질개선과 정계의 정화를 권고한다는 내용으로 골격이 짜여져 있었는데 그 4·8성명이 있기 전 나는 박정희 의장에게 이런 진언을 한 적이 있었다.
즉 지금 당장 원대에 복귀하게 되면 과연 어떠한 결과가 초래될지 심사숙고를 해야 할 것이고, 원대에 복귀할 결심을 굳히더라도 당선이 되든 낙선이 되든 일단 공명정대한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여 만약에 당선이 되면 민정에 참여하여 혁명과업 완수를 위해 이바지하고 낙선이 되면 약속대로 원대복귀하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 진언의 요지였다.
한편 박 의장의 4·8성명이 발표되자 재야에서는 4월 15일 재야지도자 11명의 명의로 된 성명서를 통해 3·16성명을 변형한 것이라며 격렬하게 반대를 했으나 재야정치인의 활동을 허용한 4·8성명이 박 의장의 출마를 전제로 한 것이라는 추측 속에 점차 그 강도가 약화되고 민정이양에 대비한 선거채비를 서두르는 쪽으로 그들의 행동방향이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성명을 발표했던 박 의장은 민정에 참여해 주기를 바라는 혁명주체세력과 공화당의 건의를 받아들여 5월 27일 민주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받은 다음 8월 30일에는 국방부 주관 하에 개최된 자신의 전역식에 참석한 뒤 그발 오후 공화당에 입당하는 절차를 거친 연후 에 8월 31일에 거행된 제3차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자신에 대한 대통령 후보 지명을 공식적으로 수락함으로써 결국 그해 10월 IS일에 시행된 제3공화국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다.
그런데 8월 30일에 거행된 박정희 대장의 전역식이 거행되기 전 3일 동안 나는 고별인사차 서부에서 동부까지의 전방지대를 횡단하며 그 어간에 배치되어 있는 각 사단본부를 시찰하는 박 의장의 부대 시찰여행에 동행을 했었는데 고별시찰여행 기간 중 박 의장은 각 사단의 주요 지휘관들과 사단본부의 참모장교들에게 특히 불원간 시행될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으로 당선되기 보다는 차라리 낙선이 되기를 바라는 터이니 절대로 공명선거를 저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는 당부를 했던 일을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박정희 대장의 전역식이 거행된 것은 철원군 갈말면 지포리(芝浦里)에 있는 5군단의 비행기지였다. 그날 박 장군의 17년간에 걸친 군대생활을 마감하는 그 전역식장에는 박 장군 내외와 3부요인, 주한 외교사절, 한·미 고위장성 및 각계인사 등 600명이 참석했고, 1개 사단의 병력과 공군전투기 핀대가 행사부대로 동원되어 분열식과 공중퍼레이드 등의 다채로운 고별행사를 연출했다.
그날 오전 11시 21발의 예포가 발사되는 가운데 개막이 된 박 대장의 전역식전에서「陸軍大將 朴正熙 命 豫備役編入」이라는 국방부 일반명령 제683호를 낭독했던 나는 개식사를 통해 그간 군의 발전을 위해 기여한 박 장군의 공로를 찬양하는 한편 국가 재건의 궁극적인 목표달성을 위해 전 국군장병이 필승의 태세를 더한층 강화해 줄 것을 강조했고, 고별사를 위해 마련해 놓은 연단 앞에 선 박정희 장군은 고별사를 통해 "2년간에 걸친 군사혁명에 종지부를 찍고 혁명의 악순환이 없는 조국재건을 위해 제3공화국의 민정에 참여할 결심을 했다." 고 말하고, "민족적 주체세력을 형성하여 조국의 번영을 위해 여생을 바칠 각오" 라는 요지의 소신을 피력한데 이어 "이 나라에 나와 같은 불우한 군인이 없기를 바란다." 는 말을 남기고 연단을 물러났었는데,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왠지 모르게 어떤 인간적인 연민의 정을 느끼게 했던 그 마지막 한마디 말은 그로부터 16년 후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권력 핵심부의 한 측근(중앙정보부장 金載圭)에 의해 시해를 당했을 때 나로 하여금 혹 전역식 때 박 장군이 자신의 앞날에 그와 같은 불행한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감하고 그런 말을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했었다.
한편 1963년 10월 15일 제3공화국을 출범시키기 위해 시행한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차점자인 윤보선 후보보다 15만여 표가 많은 근소한 표차로 당선이 되었는데, 개표가 진행되고 있던 그날 밤 텔레비전을 통해 개표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특히 군 병력과 군인가족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 경기도의 일부 지역과 강원도 지구에서 박정희 후보의 표가 윤보선 후보의 표보다 덜 나온 대신 영·호남 지방에서 박 후보의 표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현상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었다.
즉 일부 경기도 지역과 강원도 지구에서 윤보선 후보의 표가 더 많이 나온 것을 본 나는 박정희 장군이 나와 함께 각 사단을 순방하며 고별인사를 할 때 부정으로 당선되기 보다는 차라리 낙선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면서 절대로 공명선거를 해치는 일을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던 그 말을 여러 지휘관들이나 참모장교들이 박 장군의 명예를 위해 철저하게 이행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또 영호남 지방에서 박정희 후보를 지지하는 표가 압도적으로 많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본 나는 물론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한 일은 아니었지만 혹 그해 여름철 영호남 지방에서 심한 수해를 입게 되어 논에 심을 모가 없어 모심기를 못하고 있을 때 국방부에서 1,500여대의 군 트럭을 동원하여 충청북도와 경기, 강원지구의 농촌에서 끌어 모은 모를 영호남 지방의 농촌으로 실어다 준 그러한 노력도 일조(一助)가 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 것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해병대 사령관 글 > 4대사령관 김성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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