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20. 國防部長官 時節
(3) 6·3 사태
내가 국방부장관으로 입각했던 1963년도는 다행히도 그해 12월 중순 제3공화국의 출범으로 군정이 민정으로 전환되긴 했으나 정국의 혼란이 격심했던 한 해였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나는 제3공화국 정부의 내각을 활 때 유임하는 장관의 한 사람이 되었었다.
그런데 군정에서 민정으로 전환된 제3공화국은 1964년 3월 하순경부터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던 한·일회담 반대데모로 큰 시련을 겪었다.
이승만 대통령 정부 때 1차에서 4차까지의 회담이 개최되고 민주당 정부 때 5차 회담이 개최된 바 있었던 그 한일회담은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던 그해 10월 20일 김종필(金鍾泌) 중앙정부부장과 일본 정부의 오히라(大平正芳) 외상간의 6차 회담이 개최되고, 그해 11월 11일에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일본을 방문하여 이께다(池國) 수상과 회담을 가진 바도 있었다.
그리고 1962년 11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외상이 대일청구권과 무상원조 및 차관 등 문제와 관련된 구체적인 논의를 할 때 김 부장이 6억불(차관포함)을 요구한 바가 있었는데, 그때 「김·오히라 메모」가 교환되는 과정에서 1억 3천만불을 사전에 수수했다는 설이 나돌아 정가를 뒤숭숭하게 했었다.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데모가 가장 거세게 일어났던 시기는 김종필 공화당 의장과 이께다 수상이 일본 중의원(衆議院)의 당 총재실에서 회동하여 4월 초에 열리게 될 예정으로 있던 양국 외상회담에서 한·일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조기에 타결짓기 위한 현안문제를 논의하고 있던 1964년3월 하순경이었다.
동경에서 김·이께다 회동이 이루어지고 있던 3월 24일 서울에서는 서울대 법대생과 고·연대생 등 약 5,000명의 학생들이 한일회담의 굴욕적인 타결을 반대하는 데모를 벌여 사회를 혼란시켰고, 25일에는 데모가 일부 지방에까지 확대되는 가운데 서울 도심지에서는 데모대의 일부가 청와대 앞에서 수도경비사령부의 무장병력과 대치하는 등 일촉즉발의 험악한 사태를 빚기까지 했다.
그 당시 정부로서는 한일협상의 조기타결로 정부가 직면해 있던 경제적인 난국을 타재하고 경제발전의 토대를 구축하려는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의지에 따라 학생들이나 야당 정치인들의 반대공세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그 일을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으므로 4월 6일 내무부에서는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불법데모를 금지하는 훈령(3호)을 발표하는 등 강경조처를 취하였고, 5월 11일에는 박 대통령이 국운(國運)을 걸다시피 하고 있던 한일회담의 조기타결을 성사시키기 위해 최두선(崔斗善) 국무총리를 외무장관으로 있던 정일권(丁一權) 장군과 교체하고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 자리에는 일본통으로 알려져 있던 장기영(張基榮) 한국일보 사장을 앉히는 한편 경제기획원장관과 농림부장관을 역임한 원용석(元容奭) 씨를 무임소장관의 일원으로 기용하는 가운데 그 제3공화국 정부의 2대 내각을 발족시키게 되었는데, 정계 일각에선 2대 내각을 김종필 공화당 의장을 총수(總帥)로 하여 돌격을 감행할 한일회담 고지 점령을 위한 돌격내각이라고 평하고 있었다. 그리고 2대 내각 발족 시에도 나는 유임된 장관의 한 사람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한데 그 두 번째 내각을 짤 때 박 대통령은 나에게 이런 지시를 했다. 즉 정일권 장관의 총리 기용으로 공석이 된 후임 외무장관으로 자유당정권 때 국방장관을 역임했고 그 후 서독 주재대사도 역임한 적이 있는 해군의 창군 원로인 손원일 제독을 기용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손 제독을 직접 만나 그러한 뜻을 전하고 의향을 타진해 보라고 했다. 말하자면 나에게 입각교섭을 맡긴 셈이었는데 결국 그 입각교섭은 손 제독이 그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음에 따라 그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때 손 제독이 어떠한 이유에서 거절을 했는진 모르나 박 대통령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그 다음 날 손 제독을 반도호텔 휴게실에서 만나 박 대통령의 뜻을 전하고 힘이 드시겠지만 외무장관직을 맡아 역사적인 한일회담 타결을 위해공헌하실 용의가 있느냐고 했더니 그 이유는 밝히지 않고 완곡하게 거절을 하는 바람에 한동안 정 총리가 외무장관을 겸임하고 있다가 태국 주재 한국대사로 있던 이동원(李東元) 씨가 후임 장관으로 기용이 되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일후(5·21) 나는 수도경비사령부에 소속된 13명의 무장군인들이 서울지방법원에 난입하여 숙직판사를 찾았으나 법원에 없자 숙직판사의 자택으로 몰려가 불법데모를 하다가 체포된 학생들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를 협박한 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큰 곤욕을 치렀다.
그러한 사건이 발생하자 국기(國基)를 흔드는 난동이라며 격분한 야당국회의원들이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를 발의키로 결정하는 한편 나와 양찬우(梁燦宇) 내무부장관에 대한 해임 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 강력한 인책공세를 취한 것이었다.
그래서 22일 나는 정일권 총리와 양찬우 내무장관과 함께 국회에 나가 정부측의 난처한 입장을 해명하는 보고와 질의에 대한 답변을 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군인들이 물의를 일으킨데 대해 정중히 사과를 했던 나는 군인들이 그러한 짓을 한 이유가 불범데모를 한 학생들에 대한 수사당국의 구속영장 신청이 판사들에 의해 기각되는 일이 많아 국가의 안위를 염려했던 나머지 국법질서를 엄히 다스려 달라는 충정에 기인된 것이란 생각이 들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군의 군기와 국법질서를 문란케 한 행동이었던 만큼 진상을 조사해서 엄히 다스리겠다는 말을 했고, 나의 그러한 언질을 뒷받침하듯 바로 그날 오후 민기식 육군참모총장은 황모 대위 등 주동자 8명을 무단 근무지이탈 협의로 긴급 구속하는 조처를 취했었다.
한편 그러한 물의가 빚어지자 전상이 밝혀지는 대로 의법 조처할 것이라고 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5월 23일 정국불안의 요인이 일부 정객들과 언론의 무책임한 선동행위와 일부 학생들의 불법적인 데모 및 정부측의 지나친 관용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그와 같은 불법적인 요소를 강력하게 다스려 나갈 것이라고 언명했다.
한편 이에 격분한 야당의원들이책임을 누구에게 전가시키려고 하느냐며 정부에서 수습을 하지 못하겠다면 박 대통령이 하야를 하라며 반발을 했고,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법의존엄을 수호하기 위해 궐기대회를 여는 등 사태가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 27일 국회에서는 야당 국회의원들이 제의한 나와 양찬우 내무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이 표결에 부쳐지게 되었는데 그 결과 두건 모두 부결되고 말았지만 그러한 일을 당한 나로서는 여간 심기가 불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후 야당 국회의원들은 무장군인들의 법원 난입사건과 5월20일 4명의 기관원들에 의해 납치를 당했다는 서울 문리대 송(宋) 모 학생 린치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제안을 했는데, 임시국회(42회)의 폐회일이었던 6월 2일 그 제안이 국회 본회의에서공화당 의원들의 반대로 부결이 되자 서울 시내에서는「박정권 하야」,「공포정치 종지(終止)」등의 플레카드를 앞세우고 거리로 뛰쳐 나온 수천 명의 대학생들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데모 저지에 나선 경찰병력과 투석전을 벌이고 일부는 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6월 3일이 되자 사태는 더욱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어 청와대에서는 그날 오후 3시경 박 대통령의 지시로 긴급히 소집된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열리게 되었는데, 박 대통령의 주재하에 진행이 된 안보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정일권 국무총리를 비롯한 안보회의 구성요원들에게 사태수습을 위한 묘안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했으나 무거운 분위기 속에 아무도 말문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재진했다. 즉 경찰병력과 수도경비사령부의 2개 대대 병력만으로는 사태를 수습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니 부득불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해야 될 것이라고 했고, 또 3·15 부정선거때와는 달리 공명정대한 선거를 통해 탄생시킨 제3공화국의 국가원수에게 하야를 하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니 단호한 조처를 강구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했더니 다른 모든 위원들이 나의 주장에 동조를 했고, 박 대통령도 내 의견을 수렴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설명을 부연했다. 즉 계엄부대를 서울에 진주시키려면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을 쥐고 있는 주한 유엔군사령관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미국 정부의 사전 양해도 구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으니 미국 대사와 유엔군사령관을 이곳으로 급히 초청하여 이 자리에서 승인을 받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했더니 박 대통령은 "그것 좋은 생각이군" 하며 나의 의견에 동조를 했고, 일이 그렇게 진행이 되자 정일권 총리는 나를 제외한 다른 위원들과 함께 비상계엄령을 의결하기 위한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기 위해 중앙청으로 떠나고 대통령 집무실에는 나와 박 대통령이 남아 있었다.
버거 대사와 멜로이 사령관이 급한 전갈을 받고 청와대에 도착한 시각은 그날 오후 5시경이었다. 박 대통령은 민선 대통령을 하야하라고 주장하는 일부 학생들과 야당 정치인들의 불범적인 데모를 진압하여 국법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부득불 계엄령을 선포해야 되겠다고 했더니 버거 대사는 박 대통령과 나에게 다음과 같은 4가지 질문을 했다.
즉 "국회를 해산시키는가" "전국계엄인가‥“ ”기간은 언제까지인가" "계엄군은 몇 개 사단을 동원하는가" 하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박 대통령은 국회는 해산하지 않고 대상지역은 서울 일원에 국한되며, 사태가 수습되는 대로 조속히 해제할 것이라고 했고, 나는 계엄군은 2개 사단을 동원할 것이라고 답변을 했더니 버거 대사는 "잘 알겠다" 고 했고, 멜로이 대장은 혹 최루탄이 모자라면 8군에서 지원해 주겠다고 말하면서 하루속히 사태가 수습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미국 대사의 양해와 유엔군사령관의 승인을 받게 된 나는 그 길로 중앙청으로 갔다. 그런데 중앙청 후문을 거쳐 최루가스가 누선을 자극하고 있는 중앙청회의실로 들어섰더니 나를 기다리고 있던 정일권 총리는 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분들 동의했는가" 고 물어본 다음 극히 이례적인 회의 진행방법으로 이미 심의를 끝내놓고 있던 안건에 대한 이의(異議)나 질문의 유무를 확인하는 절차만으로 심의를 끝내고 사회 의사봉을 세 번 내려치는 것으로 그 안건을 처리했는데, 그때 데모대와 경비병력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앙청 정문쪽에서는 데모대의 요란한 함성이 들리고 있었고, 최루가스 때문에 눈물을 흘리거나 재채기를 하는 등 고통을 겪고있던 국무위원들이 표정은 하나같이 침통해 보였다.
그리하여 서울일원에 비상계엄이 선포된 시각은 6월 3일 하오 8시 정각이었다. 육군참모총장 민기식 대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김계원 중장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에 진주시킬 2개 사단의 계엄부대를 선정할 때 내가 진언한 바에 따라 경기도 현리에 위치하고 있던 6사단과 경기도 양평에 집결해 있던 야전군의 예비대인 8사단을 선정했는데 당시 6사단의 사단장은 박 대통령과 육사 2기 동기이고 같은 고향 출신인 김재규(金載圭) 소장이었다. 그후 박 대통령에 의해 계속 중용이 되어 왔던 김재규 장군은 중앙정보부장 재임시인 1979년 10월26일 박 대통령을 시해하는 범인으로 등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었는데, 그때 나는 참으로 알고도 모를 일이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한편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후 나는 계엄사령관 민기식 대장에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을 철저히 준수해 줄 것을 당부했다.
즉 첫째는 휴교조처가 취해진 각 대학교(또는 대학)의 정문에 반드시 뚜렷하게 휴교표시를 하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데모를 하는 학생들과 맞닥드리게 되더라도 총을 쏘지 말 것이며, 부득이한 경우에는 곤봉으로 하체를 갈기도록 할 것, 셋째는 데모대의 집결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 기동순찰을 강화할 것, 넷째로는 특히 대학 캠퍼스에 주둔하게 되는 계엄군 부대 장병들은 아침마다 학교 안팎을 말끔하게 청소할 것이며 총장이나 학장이 출입할 시에는 「받들어 총」으로 경례를 하고 일반 교수나 교직원에 대해서도 출입에 불편이 없도록 친절하게 대하라는 것 등이었다.
계엄사령부의 포고령(布告令)에 따라 불법적인 집회·시위가 금지되고 언론의 사전 검열, 각급 학교의 무기휴교, 통금시간의 단축(밤 9시) 등의 조처를 수반하게 했던 그 비상계엄이 선포된 후 계엄사령부에서는 348명의 집시법(集示法) 위반자를 구속한 바 있었는데 그들 중 68명은 학생들이었고, 173명은 폭력배, 7명은 언론인이었다.
그후 정부에서는 7월 1일 정일권 총리가 여야 중진을 초청하여 시국수습 방안을 논의한 적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별다른 곡절없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됨으로써 정부에서는 국회의 계엄령 해제 건의에 따라 7월 29일 계엄령을 해제하는 조처를 취했었다.
다른 한편,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바로 그 다음 날 나는 이런 일을 겪었다.
즉 당시 육군 내에서는 공화당 의장으로 있던 김종필씨에 대한 여론이 좋지 못해 심상찮은 공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내가 국방장관으로 입각하기 직전인 1963년 2월 25일 공화당의 사전조직과 기타 흑막(黑幕)에 가려져 있던 의혹사건들과 관련된 말썽 때문에 자의반 타의반의 외유를 떠난적이 있었고, 또 그런 일로 제3공화국 정부의 2대 내각이 출범하기 직전까지 같은 혁명 주체인 장경순(張坰淳) 국회 부의장을 중심으로 한 공화당 내부의 반김세력(反金勢力)에 의해 퇴진을 당할 뻔했던 그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한일회담의 조기타결을 서두르고 있던 박 대통령의 특별한 배려로 가까스로 퇴진을 모면할 수가 있었다.
육군 내의 심상찮은 공기를 감지하게 되었던 나는 그러한 상황을 그대로 묵과할 수가 없어 어느 날 계엄업무를 보고하기 위해 청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솔직히 그와 같은 공기를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악화된 여론이 다소 수그러들 때까지 다시 한 번 외유를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진언을 했더니 박 대통령도 그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었던지 나의 진언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김 장관이 김 의장을 직접 만나 외유를 권고해 보라" 고 했다.
그래서 나는 김 의장과 친분이 두터운 분으로 알려져 있던 김종갑(金鍾甲) 국회 국방분과위원장과 의논을 한 끝에 그의 주선으로 바로 그날오후 3시경 육군참모총장 민기식 대장의 공관에서 네 사람이 함께 회동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내가 육군 내부의 공기를 사실대로 전하고 당분간 외유를 해 줄 것을 권고했더니 그는 충격이 켰던지 창백해진 얼굴에 불쾌감을 잔뜩 나타내고 있는 표정이었다. 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박 대통령의 뜻도 그러하다고 했더니 그는 마지 못해 결심을 굳힌 듯 한참만에 "곧 떠나겠다" 는 말을 했고, 나로부터 그 결과를 보고 받은 대통령은 이후락(李厚洛) 비서실장에게 출국수속을 도와 주라는 말을 했다.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외유를 떠난 시기는 6월 중순경이었고, 외유로부터 돌아온 시기는 그해 연말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외유로부터 돌아온 후에는 그에 대한 심상찮던 공기가 다소 수그러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1964년도에 6·3사태로 쓰라린 시련을 겪었던 나는 한일협상이 타결을 보게 된 1965년도에도 또 한 차례 비슷한 시련을 겪었다.
6·3사태 후 학생들의 데모와 야당 정치인들의 대정부 투쟁이 가장 격화된 시기는 한일협상의 타결이 임박하고 있던 1965년 4월 중순경이었다.
그때에는 데모에 참가했던 동국대생 김중배(金仲培)군이 사망했는데다 야당 국회의원인 이철승(李哲承)씨 집에서는 괴화(怪火)가 일어나고 박한상(朴漢相)씨 집에는 투석사건이 발생하여 정국을 긴장시켰는데, 그때 윤보선 전 대통령은 매국적인 한일회담을 백지화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고, 야당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굴욕적인 대일외교 반대투쟁위원회」에서는 4월 17일 오후 효창운동장에서 모임을 갖고 데모를 강행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내무·국방장관과 중앙정보부장, 검찰총장, 수도경비사령관을 비롯한 치안 및 경비담당 책임자들이 자리를 같이한 가운데 긴급 치안대책회의를 열어 적절한 대비책을 검토하고 매일 아침 간담회를 개최하여 대비책을 강구해 나가고 있었는데 6월 22일 동경에서 한일협정이 조인되자 야당 의원들은 단식에 돌입하는 가운데 한일협정의 무효를 선언하며 윈내투쟁을 더한층 강화하며 비준(批准) 반대를 결의했고, 원외(院外)의 지방 당원들도 단식투쟁을 벌이는 등 사태가 심상찮은 양상으로 진전되고 있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정 총리가 정치학생, 정치교수의 추방 등 7개항을 발표하는 가운데 8월 26일 서울지구에 국한된 위수령(衛戌令)을 발표하여 사래를 수습하게 되었는데 그때 서울에 진주했던 부대도 6사단이었고, 위수령이 해제된 날짜는 9월 25일이었다. 1965년 6월 22일에 조인된 한일협정은 그해 12월 18일에 비준서가 교환됨으로써 완전한 타결을 보기에 이르렀다.
한·일 양국의 국교 정상화와 정치적, 경제적인 협력 증진을 가져오게 했던 한일협정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 내용에 가해졌던 비판에 관해서는 굳이 언급치 않기로 한다. 그리고 한·일 양국의 불행했던 과거 청산과 새로운 미래 창조를 희구했던 시대적인 소망이 우리의 국가발전을 위해 과연 얼마만큼 성취가 되었는지 그러한 문제에 관해서도 평가할 전문인들이 따로 있으므로 나로서는 다만 지난날 우리들에게 쓰라린 시련을 안겨 준 역사의 길목에서 내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겪었던 일을 이렇게 돌이켜 보았을 따름이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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