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19. 海兵隊 司令官 時節 (10) 그 후의 事態進展

머린코341(mc341) 2014. 9. 10. 20:49

국방의 멍에 - 19. 海兵隊 司令官 時節

 

(10) 그 후의 事態進展

 

  군사정면의 진일보의 사태진전을 가져 오게 했던 것은 18일 오후 1시 모처에 은신해 있던 장면 총리가 나타나 그때 이미 체포 감금되어 있던 국무위원들과 마지막 국무회의를 열어 군사혁명위원회의 계엄령 선포를 추인한 다음 군사혁명위원회에 집권이양(執權移讓)을 결의하고 내각 총사퇴를 했던 일과 18일 오후 4시 40분 3군 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을 포함한 30명의 군사혁명위원과 2명의 고문을 정식으로 임명, 발표했던 일, 그리고 5월 19일에 있었던 윤보선 대통령의 하야성명 등이었는데, 장면 내각의 정권이양과 총사퇴 후에 발표된 30명의 군사혁명위원 명단 속에 각 군 총장과 해병대사령관의 명단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그때 비로소 3군 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이 군사혁명을 지지하게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한편 19일 오후 2시에 이르러 군사혁명위원회는 제1차 총회를 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기로 결의했고, 5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는 혁명정부의 내각 구성을 발표했는데, 그 내각 구성 때 해병대사령부 작전국장 문희석(文熙奭) 대령이 문교부장관으로 입각이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연유가 있었다.

 

  즉 조각작업을 할 때 박정희 장군(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이 나에게 조각명단을 제시하면서 해병대에서 공보처장 한 사람을 천거해 달라고 하기에 문득 떠올리게 된 문희석 대령이 공보처장 보다는 문교부장관으로 천거하는 것이 더 적격인 것 같아 박 장군에게 6·25때 중앙대학교 부교수의 신분으로 해병대에 입대하여 현재 사령부 작전국장으로 있는 문 대령의 학벌과 인격 등을 소개하면서 문교부장관으로 입각시켜 줄 것을 요청했더니 즉석에서 문교부장관으로 올라 있는 심흥선 소장 이름을 빈칸으로 남아 있는 공보처장 자리로 옮기고 심 소장의 이름이 지워진 그 자리에 문희석 대령의 이름을 적어 넣는 것이었다.

 

  이미 고인이 되고 말았지만 그때 문교부장관으로 입각이 되었던 문희석 씨는 재임기간중 소임을 훌륭하게 수행했고, 또 장관직을 물러난 뒤에는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던 것으로 알고 있다.

 

  5월 20일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는 사령부 비서실장 홍성철 대령으로부터 백령도에 있는 마페트 신부(한국명 부영발)가 군사혁명을 지지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천주교 신부이면서 천주교 신도인 장면 정권을 무력으로 전복시킨 군인들을 어패서 지지하겠다는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그래서 그 까닭을 묻자 홍 대령은 중국의 공산화를 체험했던 마제트 신부가 민주당 정부가 들어선 후 반공정책이 미약하여 한국의 공산화를 우려해 오고 있던 차에 군사혁명을 일으킨 군인들이 강력한 반공정책을 내걸고 있는 것을 보고 아직 혁명을 지지하지 않고 있는 미국 정부를 설득하여 혁명을 지원하겠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 선교사인 마페트 신부는 내가 사령관으로 취임한 직후 서해 도서부대를 초도순시할 때 홍 대령의 안내로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던 분이며, 무의촌이었던 백령도에 병원 등의 무료 의료시설과 결핵요양원 등을 설립하여 자선사업과 전도사업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홍 대령으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1949년 중국 본토가 공산화될 때까지 중국에서 선교사업을 하고 있던 마페트 신부는 장개석 국민당정부가 대만으로 쫓겨남과 동시에 중국 공산당에 의해 간첩죄로 체포되어 중형을 선고받고 수년간 감옥에서 복역을 하다가 같은 아일랜드계 출신 정치인으로서 그와 절친한 친구 사이인 존 F 케네디 상원의원(후일 35대 대통령 역임)과 영국 정부의 끈덕진 구명운동으로 석방이 된 후 공산화되기 전까지 자신의 영혼을 부어 선교활동을 해 왔었고, 또 오랜 세월 혹독한 옥살이를 했던 한맺힌 중국땅을 잊을 수가 없어 1959년 중국땅에서 가장 가까운 서해 최북단의 반공전초기지인 한국의 섬 백령도로 와서 공산화된 중국과 중국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러한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저 마페트 신부가 군사혁명을 지지하고 나섰던 것은 군사정변 그 자체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 한국이 공산화되지 않기를 바란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던 것으로 이해가 될 수 있는 일이었는데, 그러한 목적을 위해 서울에 왔던 마페트 신부는 그가 먼저 찾아갔던 주한 미국 대사와 8군사령관 등이 군사혁명에 극력 반대입장을 표명하자 부득이 가톨릭 신자인 홍성철 대령을 찾아와 홍 대령의 주선으로 그 당시 수도방위사령관으로 있던 해병대의 김윤근 장군과 연락을 가진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장도영 중장과 박정희 장군에게도 소개되어 그때까지 군사혁명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표명을 유보하고 있던 미국 정부를 설득하기 위해 사령부 비서실에서 홍 대령과 함께 밤을 새며 케네디 대통령과 백악관의 대학 동창생 참모 및 그가 아는 의회지도자들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으로 알고 있고, 또 그러한 노력 끝에 그는 최고회의 의장 장도영 중장과 케네디 대통령과의 회담을 주선하게 되었으나 케네디 대통령의 구라파 방문으로 회담이 실현되지 못하고 그해 11월 중순경에 이르러 박정희 의장의 미국방문은 실현이 되었었다.

 

  대학시절에 헤비급 권투선수로 주(州) 챔피언을 지낸 적도 있었다고 하는 마페트 신부는 성격이 매우 소탈한 분이었는데, 그 후 나는 그가 서울에 들릴 경우 간혹 음식점이나 요정으로 초대하여 정분을 나눈 적이 있었다. 1959년 이래 백령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마페트 신부는 1980년초 건강이 여의치 못해 백령도를 떠나 영등포에 있는 강남성심병원에서 요양을 하며 세계 구라협회(救癩協會)의 일을 돌보다가 1986년 9월 64세를일기로 타계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그런 일이 있은지 수일 후 나는 해병대의 혁명주체세력들로부터 퇴계로에 있는 구 해군본부 건물에서 회의가 있으니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곳으로 갔더니 널직한 그 회의실에는 5월 17일 나를 체포하러왔던 그 7~8명의 장교들 외에 해병대 주체세력 중의 최고 선배인 김동하 장군(그때까지는 예비역 소장으로 있다가 6월 6일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구성된 후 특별법의 제정으로 현역 소장으로 복귀) 등 40~50명의 장병들이 모여 있었다.

 

  한데 나를 그 회의장에 나오게 한 이유를 알게 된 나는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내가 확인하게 된 이유란 김동하 장군이 나에게 건네 준 종이쪽지에 적혀 있는 5명의 장성들을 숙군대상자로서 예편시키라는 것이었다. 남상휘(준장), 송인명(준장), 최용남(준장), 고길훈(소장), 김두찬(소장) 장군 등이 곧 대상자들이었다.

 

  그 명단을 훑어 본 나는 다시 한번 군의 위계질서가 하루아침에 전도되고 만 안타까운 현실을 한탄하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즉 만약에 이들의 요구를 호락호락 들어 주었다간 장차 무슨 수모를 당하게 될지 모르니 사령관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단호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과 나와의 관계부터 분명히 해야겠다." 고 말한 다음 "여러분이 예편한 사람이라면 모르되 군복을 입고 있는 한 여러분은 나의 부하이고 나는 여러분의 상관인데 군대라는 특수조직사회에서 상관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상관에게 명령을 하듯 지시를 한다는 것은 동서고금에 없었던 일이고, 특히 군기가 엄정한 우리 해병대에서 이런 짓을 하다니 말이 되겠는가.“ ”나의 직속상관은 국방장관이니 계통을 밟아서 지시가 내리도록 해 주기 바란다.“ ”앞으로는 여러분의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을 것이며 필요하면 내가 여러분을 부를테니 그렇게 아시오." 하곤 선걸음에 모자를 쓰고 회의장을 나오고 말았는데, 그런 일이 있은 후 그들은 두 번 다시 나를 불러내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 후 송요찬 국방장관으로부터 그 숙군대상자(5명)의 명단이 나에게로 전달되어 왔기에 나는 그 5명의 장성들 중 그때 이미 구금상태에 있던 남상휘 준장과 송인명 준장 등 2명의 장성을 예편시키고 나머지 장성들은 제외시켰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